한국일보

“제자 덕에 모국방문 하다니...”

2006-05-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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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롱아일랜드)

아멜 선생과 칩스 선생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아멜 선생은 알퐁스 도테의 꽁트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프러시아 군대가 프랑스로 진주할 때의 이야기다. 후란츠는 그날 지각을 했다. 보통 날과 달리 이 날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후란츠는 숨을 죽이며 교실에 들어갔다.

아멜 선생은 뜻밖에도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이제 마지막 수업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시간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이제부터는 독일어를 누구나 다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아멜 선생은 “한 국민이 노예가 된다 해도 자기 나라 말만 잘 간직하고 있
으면 그것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곧바로 종이 울렸다. 수업은 끝났다. 아멜 선생은 “여러분, 나는, 나는...” 하며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분필 한 토막을 집어들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썼다. 아멜 선생은 40년
근속의 노교사였다.칩스 선생은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굿바이 칩스 선생’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선생이었다. 그는 일류학교 교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끝내 그 꿈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금일봉과 괘종시계 하나가 그의 정년퇴직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는 노구에 학교 앞에서 하숙생활을 했던 것이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학생들은 순번으로 그 선생의 집을 찾아가 차(茶)를 대접했다. 선생은 그 때마다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웠던 기억들을 되새
길 수 있었다.


위의 두 선생은 모두 불행했다. 명성도, 권세도, 영화도 없는 생애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생애 속에서 숙연하고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낄 수 있다. 국가에 대한 책임감, 인간에 대한 신뢰감, 그리고 꿈 속에서나마 느끼는 그 은밀한 보람같은 것.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이런 선생님이
몇 분이나 계실까?
나는 40년 전에 서울에 있는 어느 여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다. 애숭이 티를 겨우 벗어난 중학교 1학년생 66명을 1년간 담임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중 두 사람이 계속해서 전화나 우편으로 연락하며 사제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거의 해마다 서울에 가면 연락해서 만나곤 하다가 은퇴한 후부터는 고국 방문의 길이 멀어져 만나지 못한 지가 어언 7년이 지났는데 어느날 그 중 한 제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선생님, 요즘엔 왜 서울에 오시지 않습니까? 많이 뵙고 싶어요”라고 다그친다.
그 제자가 비행기표를 보내온 것이다. 코허리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지난 날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

얼마 전(5월 15일)에 스승의 날이 지나갔는데 그 날이 되면 학생들이 빨간 카네이션을 선생님들의 가슴에 달아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서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 그 제자 덕분에 모국방문을 하게 되다니, 과연 나는 그런 특대를 받을만한 일을 제자들에게 베푼 것인가? 작은
양심의 소리와 함께 숱한 제자들 앞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연숙아, 고맙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서 인생을 배워야 하리라 생각되는구나. 부디 세상 끝날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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