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천천히 그리고 멀리

2006-01-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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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만 연 (수필가/회계사)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꿈을 안고 새 계획을 세워본다. 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에 이르기까지 작고 크다 뿐이지 매한가지이다. 계획은 그 해만의 것일 수도 있고 수년, 10년 또는 세대를 뛰어넘는 장기계획일 수도 있다. 계획은 비록 실패로 끝나든
훌륭하게 종결짓든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계획이란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며 꿈을 실현시키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세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계획은 경제개발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국민의 가장 절실한 욕구인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개발에 착수하였는
데 그 계획은 독재자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힌다. 그때 한국의 수출액은 3천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지난해에는 물경 3천억달러에 육박하였으니 그동안 1만 배가 늘어난 셈이다. 수출 금액뿐만 아니라 그 품목도 농산물, 광물 같은 1
차 산업품목에서 지금은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 등 질적으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한국은 극동의 ‘아침이 고요한 나라’가 아니라 한류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한국경제의 급성장은 국민성에 크게 힘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은 대체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의존하는 민족이다.


결정이 빠르고 또한 다혈질이어서 남에게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당장 눈앞에 어떤 결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역동적인 에너지가 모아져 단기간에 한국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에서 휴대전화가 발달된 것은 한국인의 조급한 성격에 잘 맞기 때문이라는 조크까지 생길 정도이다. 한국 사람과 같이 일하는 외국인들은 “빨리 빨리”는 대부분 알아듣는다. 따지고 보면 이번 황우석 교수의 조작극도 급한 마음에 아직 달성치도 않은 성과를 미리 앞당겨 발표
하는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벌써부터 독일월드컵 축구로 온 국민이 흥분해 있고 방송사가 앞장 서 이를 보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래도 무사할까 하는 걱정까지 들게 만든다. 현재 세계의 웬만한 국가는 모두 존망을 다투는 경제게임에 뛰어들고 있어서 한국은 마냥 지난날의 성공에 샴페인만 터뜨리고 있을 형편이 못된다. 한국은 지금까지 앞만 보고 급히 오느라 흘리고 빠뜨리는 것들이 많았지만 용인되어 왔으며 또한 눈앞의 것만을 챙기다 보니 옆에 놓인 것, 멀리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의 의욕과 열정만 가지고 밀어붙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종전에 용인되던 적당주의와 시행착오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지난날 경제발전에 촉진제가 되었던 한국인의 그런 유별난 국민성은 이제는 거꾸로 선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앞으로는 참신한 창의력과 합리적인 판단력 그리고 이성적인 자기관리로 무장하지 않고는 무한경쟁에서 살아 남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우리의 낡은 생활습
성과 사회 구석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부조리를 하나씩 청산해 가야만 한다. 한국은 이제 달리지 않아도 먹고 지낼 만큼 성장하였고 형이상학적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우리는 매사를 감정에 의존하여 너무 빨리 덤벼들고 그리고 급하게 처리하려는 냄비근성에서 벗어나 좀 천천히 그리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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