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과 아름다움

2005-07-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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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권(동부제일교회 목사)

온 천지 녹음방초 푸르름이 싱그럽고 활기차다. 집집마다 화려하게 활짝 핀 꽃들은 눈을 부시게 한다. 이웃집 잘 가꾸어진 화려한 화단은 황홀함이 유난하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하얀, 빨간, 여러가지 색채의 다채로운 꽃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참 아름답다” 절로 탄성이 입 밖
으로 새어나오게 된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알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알음답다” 곧 “아는 것 답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라는 말은 겉모양의 시각적인 화려함이나 예쁨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속에서부터 스며나
오는 그윽한 지성미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사실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만 온갖 것으로 치장한 여인을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일 때가 많다. 더구나 자기의 본래의 것은 찾아볼 수 없도록 성형수술을 한 데다가 뛰어난 화장술로 꾸며놓은 얼굴은 조화처럼 예쁘기는 해도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화는 아무리 화려하고 예뻐도 벌이나 나비가 날아드는 일은 없다. 꿀도 없고 향기도 없기 때문이다.


논어에서 “知者樂水 仁者樂山(지자요수 인자요산-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기의 ‘인자(仁者)’란 역시 아름다움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여름 야산의 온갖 꽃들이 토하여 내는 향기들이 싱그러운 풀내음에 섞여 풍겨내는 산의 아름다운 자태는 집안의 화단에 가꾸어 놓은 꽃들과는 유가 다르다. 그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다.
나를 인자라고 말하기는 천부당만부당 하고 무엄하다 할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한국에서 살 때는 산을 무척 좋아했고 산 타기를 좋아했다. 미국 온 후로 산을 찾아 나서기에는 산이 너무도 멀리 있고, 산 타기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어 한 번도 산에 가보지도 못했고 산 타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산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좋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온갖 시름 다 잊을 수 있고, 한없이 행복해진다. 온갖 힘을 다 해 천신만고로 산정에 오른 후 산 계곡을 내려다보면 산을 오를 때의 어려움과 세속의 온갖 시름을 다 잊게 되고 성취감에 젖어 행복하던 것과도 같다.“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아 2:12), 사론은 갈멜산 남쪽에 위치한 거의 뉴욕의 롱아일랜드만한 대 평원이다.
여기 봄이 되면 야생화가 만발하여 아름답다고 한다.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는 솔로몬 자신을 지칭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영어성경(NIV)에서는 ‘장미’로 번역된 ‘수선화’는 들꽃이다. ‘골짜기의 백합화’도 야생화로서 꾸밈없는, 생긴 그대로의 꽃들인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모습과 흡사하다. 나사렛 목수로 성장하셨던 주님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였다. 고운 모양도 없었고 풍채도 없었다.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것 같았다.그는 언제나 단벌이었고 맨발이었으며 창기와 세리들과 죄인들, 가난하고 소외되고 눌린 자들이 사는 사론에서 그들에게 위로자가 되고 친구가 되고 치료자가 되고 공급자가 되는 사론에 핀 수선화였고 백합화였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술라미 여인을 말하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 혹은 교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 혹은 성도들은 아름다운 백합화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다. 가시나무와 같은 세상의 온갖 고난과 고통과 시험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산처럼 큰 교회가 없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고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영원히 영원히 수선화처럼 백합화처럼 아름다운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내 옆에 계시면서 나를 백합화처럼 예뻐하시므로 나는 산을 오를 때처럼 언제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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