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죽음 부른 트랜지스터 라디오

2005-07-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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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일(우정공무원)

지난 달 뉴욕 일원의 6.25 참전 전우회원들이 주축이 된 친목단체인 상춘회 정기모임에 초청을 받고 참석한 일이 있다. 회의 시작 전 회원들의 건강과 한인사회의 어른들로써 모범이 되는 모임이 되자는 다짐을 선, 복창으로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면서 이곳만은 잡음 없이 뜻있고 알찬 황혼모임이 되기를 기원했다.

중식 도중 한 분에게 전쟁기간 중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고 물었더니 기억은 무슨 기억, 잠 못자고 어려움 참으면서 죽기 살기로 총질했던 기억만이 남는다고 하였다.미군의 풍부한 보급품과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한국동란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지만 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필자는 6.25와 더불어 월남전 파병도 잊을 수 없는 일로써 개인적으로 있었던 일과 타병사에 관한 사연 및 예하 부대 지휘관에 관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가곤 한다.


첫째, 파병 얼마되지 않아 영내 야간경계 근무 중 동료 전우와 달빛 아래서 생전 처음 파인애플을 대검으로 대충 대충 깎아 먹고난 후 입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여러 날 동안 음식물을 먹지 못하고 쓰라리고 아픈 통증에 시달렸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둘째, 사단급 작전 전투시 예하부대(30연대) 어느 사병이 7곳에 총상을 입고 살아남아 영웅 칭호를 받으면서 특별휴가(30일)로 본국에 갔다가 김포공항을 출발, 귀대 도중 증발해버려 관계자들을 애타게 했던 일이다.영어를 몰라 국제 미아가 될 뻔 했던 이 병사는 귀대일자 1개월이 지나도록 필리핀 슈빅만의 클라크 공군기지 내 미군 정양 병원에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귀대했던 사연이다.

셋째, 당시 한국에서는 국산 트랜지스터 라디오(금성사)가 생산된지 얼마되지 않아 대부분 가정에서는 전부터 사용해 온 진공관식(5구,6구 등) 라디오를 겸해서 사용하고, 수입된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7석, 8석 등이 주를 이루었다.67년도 필자가 속한 백마사령부 P.X.(군부대 매점)에는 최신식 일제 트랜지스터(소니) 13석이 출현 판매되고 있었다.

저녁 조용한 시간에는 머나먼 고국의 소식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 전쟁과 열사지대의 누적된 피로를 푸는데 위로가 되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얽힌 사연이다.백마사령부(사단장 박현식 소장) 예하 도깨비부대(28연대장 최명재 대령)의 11중대(중대장 박종식 대위) 위치는 베트남 중부 투이오하 근방 홈바산 근처 야산에 중대본부가 있다. 사건발생일 저녁 외곽 야간경계 근무를 하고 있던 병사들이 인근호에 모여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본국 KBS
의 추석 특별쇼를 청취하면서 전쟁 중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들떠 흥분하고 있던 시각이다.
아군의 경계로 전방에 설치된 각종 장애물과 철조망을 초저녁부터 절단기로 절단, 기회를 보다
가 자정이 넘어 적들은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수류탄과 칼만을 소지한 채 부대 내로 잠입했다.
아군 병사 내무반(숙소)마다 수류탄을 투척, 백마부대가 파병온 후 가장 큰 피해를 당했던 기습
사건이다. 초저녁부터 적들은 11중대 인근부대를 포격, 시선을 돌린 다음 당해 중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적들의 양동작전인 전략전술을 알고 있는 지휘관(중대장)이었다면 전 중대원들에게 야간 경계근무에 추호도 소홀함이 없도록 경각심을 주고 수시 경계근무 상태를 확인했으면 수많은 부하 병사들의 인명피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다.

역사가 비춰주듯 태평양전쟁시 일본 패전의 원인이 된 미드웨이 전투 패전을 보면 당시 지휘관(나구모 제독)의 순간 판단 착오로 전세가 미국으로 넘어간 것을 기억한다.그 뿐인가? 모든 기업들도 경영에 능숙한 CEO(최고경영자)를 만나야 성공할 수 있으며 경주에 참가한 말들까지도 기수를 잘 만나야 하고, 가마(보교나 사인교) 타고 가는 사람도 가마꾼(교자꾼)을 잘 만나야 편하게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군부대 장병들도 현명하고 탁월한 판단력 있는 지휘관을 만나야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이역만리 월남전선에 참가,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쳐 산화한 장병들의 명복을 빈다. 아직까지 병상에 있던 옛 전우들은 하루속히 쾌유하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며 유가족 모두에게 심심한 사의와 신의 가호가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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