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혼 유감

2005-06-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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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진(플러싱)

청춘이란 단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인다고 어느 시인은 말하였는데 이혼이란 단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싸해 오는 것 같다.이혼율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나 또한 이혼 쓰나미에 내동댕이 쳐진 사람으로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사랑과 용서가 강조되는 시대에 분열과 미움의 대명사와도 같은 이혼은 정작 사랑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이혼을 할까? 왜 처음 만남의 설레임을 잊어버리고, 왜 첫 키스의 달콤함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이혼을 할까?나의 이혼에 즈음하여 주위분들이 한 이야기 가운데 다음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
다. “웬만하면 그냥 살어. 누구는 그런 문제 없었나?” “두 사람 다 책임이 있다구. 50대 50이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졸지에 나는 남들 다 겪는 것조차 감수하지 못하는 참을성 없는 아류가 되어버리고 근엄한 판사 앞에 죄수가 된 느낌이다.


이혼의 아픔을 묘사한 많은 글과 드라마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만, 결코 단순하게 결론내릴 수 없는 누가 이혼의 가해자이고, 누가 이혼의 피해자인지 흑백 논리에 우리는 휘둘리는 것 같다.과연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그 당사자들이 겪는 진정한 슬픔과 고뇌는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인간은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 이혼 역시 헤어짐의 한 형태일 것이나 왜 사람들은 이혼 앞에서 그렇게 치열해지는 것일까?
“가정폭력으로 구속되었다가 나오자 부인을 총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어떤 한인 부부. 그리고 남겨진 십대의 두 남매. 남편에게 위자료 대신 남편이 평생 일구어 온 사업체를 요구하고, 결국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체를 단 두달만에 파산시킨 LA의 한 한인여인.이혼 법정 앞에서 이혼소송 중인 아내와 아내의 변호사에게 총격을 가하고 자신의 머리에도 총을 쏘았다는 커네티컷주의 한 남성, 생활비로 10억달러를 요구했다는 사우디 왕의 네번째 부인.”왜 이토록 그들은 치열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일이 정말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유 아니면 파괴라는 히틀러식 발상에 왜 그토록 취약하게 그들과 우리가 사로잡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돌파구를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닌가 싶다.이혼의 상대 배우자는 배설물과 같은 것일까? 조금 전까지 내 귀한 몸 안에 있었다가 몸 밖으로 나가자마자 쳐다보기도 싫고 가까이 하기도 싫은 배설물일까?

옛날 어린 시절 동네에 머리카락을 팔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으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다른 용도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새삼 머리카락을 생각해 본다.

같은 몸의 구성원이었다가 하나는 몸을 빠져나가자 마자 천하의 몹쓸 혐오물이 되고, 하나는 어느 용도가 있기에 쓰이기도 하고, 보관하기도 한다(우리 어머니는 그 머리카락을 모아서 바늘을 꽂아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하셨던 것 같다).

부부도 한 몸이었는데...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는 상투적인 연예인들의 이별의 변을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이혼이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세계화. 이혼이란 것도 세계화 되는 것인지 몰라도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이혼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제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사회의 가장 기본 구성인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도 이 사회의 낙오자가 아니라 여전히 사회의 한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본다.최소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부분도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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