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말 보다는 행동으로

2005-06-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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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의사를 표시하는 말의 중요성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말은 사람의 감정과 의지를 전달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나를 알려준다. 머리 속에 아무리 많은 생각이 있어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고 가슴 속에 어떤 느낌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감정을 알 수가 없다. 말은 일방적인 표현의 수단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약속의 수단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말로 약속을 할 때 이 말은 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지게 된다.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이 맞아들어갈 때는 긍정적이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솔직하다, 정직하다, 책임감 있다, 신용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말과 행동이 다를 때는 부정적이고 나쁜 평가를 받는다. 부정직하다, 무책임하다, 신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말대로 행동이 따르는 언행일치가 중
요한 덕목으로 꼽히고 있으며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도 있다. 미국에서는 누구에게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면 살해 의사로 해석하여 살인미수 등 형사범죄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실제 살해 의사가 없는 협박용이나 단순히 홧김에 하는 말로 용인된다. 말과 행동을 일치 시킨다는 점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정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말이 행동이나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거짓말은 어쩌다가 하게 되는 수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하는 때가 더 많다. 또 사람에 따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직업에 따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직업도 있다. 어떤 거래나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사람 보다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
고 범죄인들이 조사를 받을 때 거짓말을 많이 한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은 거짓말인 경우가 아주 많다.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안될 것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공약을 서슴치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
을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언론에 와전이 됐다고 핑계를 대거나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 유
감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어떤 경우에는 국내에서 하고 싶은 말을 외국에 나와서 말하고 외국
에서 하고 싶은 말은 국내에서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와서 하는 말과 한국에서 하는 말
이 서로 다른 것도 정치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말이 이렇게 중요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언영색으
로 아부를 하는 사람, 감언이설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말을 악용하는 사람
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말을 잘하는 사람은 일단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
가 있다. 이렇게 말이 악용되는 세상에서는 말 보다는 행동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신용하는 것
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이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장관에게 한 말 때문에 한국이 화해 무드에 들떠 있다.
김정일이 “7월이라도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고 했고 “북미수교시 장거리 미사일도 폐기
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부시대통령 각하’라는 호칭을 쓰면서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말 끝마다 미제국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미국 때문에 이 세상이 암흑인
것처럼 저주하는 북한의 김정일이 우리도 쓰지 않는 ‘각하’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웃기는 일
이 아닐 수 없다.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6자회담 복귀와 장거리 미사일 폐기에 모두 전제조건이 달려 있다. 그런 말이 한국을 들었다 놓았다 하니 과연 김정일의 힘이 대단하다.

김정일은 정치인 중에서도 정치인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수많은 국민을 굶겨 죽이면서도 관료와 군부집단을 틀어쥐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일은 거짓말의 천재가 아니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6.15 정상회담 때나 이번 정장관 방북 때나 그의 말솜씨와 너스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김정일의 발언 이후 한국정부는 미국에 입조심을 당부하는 등 북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정부가 김정일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지나치게 어리석거나 아니면 북한과 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그러므로 북한과 김정일을 보고 판단하는 잣대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제 북한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6자회담에 나오든지, 핵무기를 만들든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미국과 한국은 이러한 북한의 행동에 따라 대응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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