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날을 맞아

2005-06-18 (토)
크게 작게
윤성일(성은장로교회 장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버지들이 얼마나 될까? 어머니날은 식당이 대성황을 이루고 꽃집 주인은 벌써 한달 전부터 준비상황을 일일히 점검하고 또 선물가게는 새로운 선물용품을 진열하곤 한다. 그렇게 어머니 날이라고 야단을 떨 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애써 태연한 척, 대범한 척 하
는 것 같다. 그것은 어쩌다 튀어나오는 퉁명한 대답에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니날은 10달러이고 아버지날은 2달러의 날”이라고 매년 푸념하는 아이리쉬계 변호사의 집에는 싸구려 로션병을 버릴 수 없어서 8m나 쌓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날을 기억하지도 또 생각하지
도 않으련다고 한다.

이창래 교수의 ‘Native Speaker’에서도 회색빛으로 그려진 초라한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런데 이미 내 모습은 더 진한 회색빛으로 가려져서 내가 내 모습을 찾아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안경 탓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원인은 모든 아버지의 정신적인 상태는 점점
젊어져(?)가고 있는데 육신은 점점 찌그러진 몰골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이들을 가끔 만난다.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측은하기까지 한다.

얼마 전 시내에서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힘겹게 밀고 건널목을 건너던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저 할머니는 그래도 다행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였다. 밀어줄 사람이 없는 휠체어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늙어서 밀어줄 아들도 딸도 다 떠나간 저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며느리 눈치 보는 시부모들, 그런 아들들의 모습을 점점 많이 보게 되면서 또 자식 자랑하는 꿈꾸는 거짓말장이 노인들을 볼 때 ‘아마 나는 더 거짓말 포장을 잘 하게 될거야’ 하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회는 너무 바르게 NANO 단위로 계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늙은이들의 움직임은 NANO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점점 속도가 떨어지는 낡은 50년대 버스를 타고 있는 승객들처럼 보인다. 남은 그들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도 잊어버린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투영해 본다.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얼마 전 중학교 동창 친구가 다 사그러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야, 지난 주에 4명이나 보냈어. 너 누구 누구 알지? 중국에 가서 죽었대. 그런데 매일 그 애들이 꿈에서 보여. 나도 갈
때가 되었나봐” “꿈 깨라. 우리가 마음이 약해져서 ‘그래, 너 딸 하나 시집보내고 얼마나 힘들어 했니. 다 알아. 감추지 않아도 돼. 악담같은 소리지만 자식들도 우리 나이가 되면 똑같은 벌을 받게 될걸.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을거야. 결국 우리가 철이 늦게 나서 당하는 것이나 무엇이 달라” 우리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철이 나는 것 같다.

지금 노인들에게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한다. 속도를 늦출수록 구박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적은 생활비라고 주눅들지 말고 공동생활의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자식들이 떠난 자리는 더 이상 바라보지 말자. 자기들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떠난 저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10번? 천만에. 욕심 부리지 말자. 그러면 어떻게 남은 때를 부지런히 살아야 할까? 간단하다. 매일 한 시간씩 공원에 가서 걷는다. 매일 신문 사설을 신문지에 베껴 쓴다. 매일 천자문 10자씩을 획 순서대로 다시 써 본다. 매일 복식호흡을 통한 명상이든지, 묵상이든지 좌우간 정신 통
일을 하는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체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절대로 지난날의 그림자에 묻히지 않도록 매일 내일 일에 신경을 쓴다. 즉 현재에서 미래로 움직이는 삶을 깨달아 보는 것이다.
늙는 것을 아름답게, 또한 멋있게 늙는 연습을 부지런히 지금부터 해보는 것이 아버지날의 각오라면 어떠할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