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

2005-06-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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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이성철(롱아일랜드)

요즘에 와서 삼강오륜을 운운할 것 같으면 아득한 옛날 조선시대에 써먹던 케케 묵은 사상을 들추어 궁상을 떠느냐고 지적할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한 공동질서의 유지와 건전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삼강오륜’의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삼강오륜의 내용인 즉, 모두가 인간관계에 대한 원리들이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어른과 아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친구간의 관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들인 것이다.


인간을 가리켜 ‘관계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자의건 타의건 관계가 체결된다.
그 관계란 크게 셋으로 볼 수 있는데 (1) 대인(對人)관계 (2) 대신(對神)관계 (3) 대물(對物)관계인 것이다. 이 세가지 관계 속에서 희로애락하며 평생을 살아가는데 그 관계들이 온전하고 정상일 때 인생이 기쁘고 즐겁다. 반대로 그 관계가 비정상일 때 인간은 부득불 분노하게 되고
슬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건 상관 없이 적용되는 만고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뭇사람들의 생태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기본 원리는 동서고금이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세상 만사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가 첫째인 것이다. 인간관계가 정상적이라야 정치, 문화, 사업, 학문, 예술, 종교 등이 정상궤도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인간 상호간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밤낮 없이 시기와 협잡이 난무하며 싸움과 살상이 그치지 않아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 이전에 인간 상호간의 관계부터 올바로 수립되어야 인간 사회가 제대로 형성되어 아름다
운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자에서 거론한 ‘오륜’ 가운데 마지막 항목인 ‘붕우유신’에 대하여 한마디 한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친구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관계 맺음이 어찌 혈연관계 뿐이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지연이나 학연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 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어 평생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상부상조의 삶을 엮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다 보면 우정이 깊어져 친형제나 다름없는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아니한 순수한 우정이 꽃피게 되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본보기로서 높이 평가받게 된다.중국 역사에 나오는 ‘관포지교’(관중과 포숙간의 우정)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구약성서에 기록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또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우정관계라 할 것이다.

필자는 근자에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을 경험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50년 지기의 친구를 잃게 된 것이다. 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사귀어 온 친구가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고 떠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지금도 꿈인양 믿어지지가 않는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세월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온 인생이 고희를 넘긴 이 시점에서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또래의 친구들이 하나 둘 타계하는 판국에 어쩌자고 짐짓 우정을 끊고 철천지 원수처럼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참을 길 없어 방황했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어 깊이 명상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그 친구가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요
15:13)고 했는데 이 나이에 친구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짓밟아 버린채 떠나가 버리다니!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 나름대로의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결과는 피차에 가슴만 아픈 일이다.애당초 우리의 우정에는 신의(信義)가 없었던 것이 화근이라고 결론짓고 말 뿐이다. 의리가 없
는 사람과는 친구관계를 맺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교훈을 새삼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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