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름 단상(斷想)

2005-06-11 (토)
크게 작게
김명욱(목회학박사)

사람은 세 가지 시(視)를 지니고 살아야 좋을 것 같다. 첫째 시는 우주를 바라보며 우주의 광활함을 생각할 수 있는 거시(巨視)다. 둘째는 우리 몸속의 핏줄에서 흐르는 피의 흐름소리와 우리 몸속의 세포들이 활동하고 있는 세포들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미시(微視)다. 셋째는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으며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세계를 뚜렷이 볼 수 있는 현시(現視)다.

숲을 보고 나무를 못 보아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 반면 나무는 보는데 숲을 못 보아 중요한 판단을 흐리게 하여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숲과 나무는 보는데 숲과 나무 사이에 피어나는 풀들을 못 보아 다른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숲과 풀과 나무를 함께 볼 수 있는 안목(眼目)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리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을 게다.
사람만큼 더디게 성장하는 동물도 드믄 것 같다. 19~20세가 되어야 성년이 되었다고 투표의 참정권을 주는가 하면 25~30세가 되어야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독립성을 인정받게 되어 결혼도 하게 된다. 거의 30년 가까이 자라고 성장해야 자가(自家)를 이루어 떳떳이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되니 이 얼마나 더딘 성장인지 모르겠다.


우주의 광활함은 사람이 이룩해 놓은 과학으로도 다 측정하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주의 광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우주가 있다. 사람을 작은 우주라고 하는 것은 사람만큼 복잡하게 얽혀 구성돼 있는 창조물도 드물기에 그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의 광활함 속에 인간이란 얼마나 작은 피조물이던가.

작은 피조물이라도 그 인간 속에 우주를 탐지하고 우주를 느끼고 우주를 향하여 꿈을 펼치는 위대함이 숨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에게 있는 인식(認識)의 능력이야말로 우주를 우주되게 하는 그 무엇일 수 있다. 왜, 인간에게만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참으로 신기하고도 묘한 일이다.

나무를 보면서 숲을 못 본다 함은 작은 일은 생각하면서 큰 틀은 잘 생각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조직의 일원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 조직의 큰 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조직의 전체가 함께 살아야 함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조직이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흔히 나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안목은 큰 숲을 보아야 함이다. ‘나라’란 큰 숲을 볼 수 있어야 큰 눈으로 큰 그림을 그리며 나라를 운영하게 된다. 특히, 나라 살림을 하게 되는 정치인들에게 있어 숲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절대 필요함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렇다고 나
라를 구성하는 국민, 즉 나무와 같은 개인 개인을 무시해서는 나라 살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사람이란 정말 묘한 존재인 것 같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나 자신을 알 수 없기에 그
렇다. 물론 나 자신이란 하나의 나무에 불과하다. 한 포기의 풀에 불과하다. 그럼 숲은 무엇인
가. 우주에 비유할 수 있겠다. 또, 한 사람을 한 나무에 비교한다면 우주와 같은 거시적 안목에
서 사람을 말한다면 인류(人類)에 비유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 즉 인류가 태어났고, 살고 있고, 앞으로 또 태어날 것이고, 또 죽어갈
것이다. 이 인류를 지탱하고 있는 이 지구. 이 지구는 모든 인류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우주의
한 점밖에 안 되는 지구, 즉 우주를 숲으로 본다면 한 나무에 불과한 이 지구안에 또 숲이 있
다. 그 숲이란 인류란 숲이다. 인류란 숲 속에 또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인간 개인개인이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과 사람이 태어남과 사람이 죽어간 후의 세계는 우주의 큰 것, 즉 거시의 눈으로 볼 때 일직선상으로 가되 큰 틀에서는 큰 원(圓)의 틀을 유지한다. 즉, 생전(生前)·생(生)·사(死)·사후(死後)의 세계는 동떨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나무처럼 본다면 떨어져 있지만 숲처럼 본다면 모두가 다 숲이란 우주의 역사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다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 개념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세 가지 시(視)를 지니고 살아야 함은 보편적이요 합리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가라 함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감성의 동물이라 항상,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순 없다. 즉, 24시간 365일 거시와 미시와 현시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노력은 해야 좋을 것 같다. 미치지 않고 돌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에 한 번쯤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와 내 안의 심장박동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미세함과 함께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