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무나 행복한 우리들

2005-06-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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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뉴저지 리버에지)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은 우리 한인동포들은 미래의 희망을 품고 너도 나도 미국땅을 밟아 이제는 떳떳하게 이민자들의 대열에 서서 활동하고 있다.그래서 지금은 수십만의 동포들이 행복한 생활을 영유하고 있지만 같은 동족인 북한은 아직까지도 외국으로부터의 식량 지원을 받지 못하면 1990년대 중반과 같이 또다시 기아 상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세계식량계획(WFP)의 전망이다. 북한담당관 리처드 레이건의 전화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종래에는 여러 외국으로부터 구호의 식량 지원으로 충당했지만 지금은 거의가 중단된 상태이다. 2년 전에 1킬로그램당 150원 하던 수입 쌀이 지금은 750원이고, 옥수수는 1킬로그램당 102원 하던 것이 지금은 502원으로 무려 5배가 값이 인상됐다.

오는 8월까지 식량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650만명의 노약자와 10세 미만의 어린이에게 하루 250그램을 지원하던 그것마저 290만명 밖에 지급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노약자나 어린이에게 지급되는 분량은 에너지 필요량의 반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필자가 북한에서 60년
전 고등학교에서 배급받던 분량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당시 북한에서는 학생들에게도 배급을 주었는데 하루 500그램을 지급했는데 그것도 무단결석하면 배급량을 공제했다. 1개월 분량이 현미쌀이 소두1말 2되, 잡곡이 8되, 합계 소두 2말(15킬로그램)이어서 당시 농촌에서는 저녁마다 수제비국, 옥수수 철에는 옥수수, 감자철에는 감자로 저
녁을 충당했다.


1등급의 배급을 받은 광산 노 동자, 모범 노동자는 학생들의 배급량의 2배인 소두 4말(30킬로그램)이 최고였었고 2등급의 대학교수, 3등급의 중고등학교 교사, 4등급의 일반공무원, 5등급이 학생, 6등급이 부양가족, 7등급이 부양가족의 자녀들, 이렇게 배급에도 등급이 심했다.

지금에 와서는 북한에서는 ‘외화벌이’로 집단으로 외국으로 나가 신발, 피복, 가방공장에서 일하는 모양인데 이번 체코의 프라하에서 200여명을 북한에서 데려다가 일하는 봉제공장의 조선인 사장의 실상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독채의 여관에서 3~4명씩 한 방에서 실내에 설치되었던 TV와 라디오도 뜯어내고 여성 보위원의 감시를 받으며 넓은 홀에서 단체로 북한 비디오를 보고 개인행동은 금하고 외출이라야 소지품 구입을 위해 여관 근처의 수퍼에 가는 것이 고작이다. 여성들의 근무기간인 3년 사이에 회사 버스로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시내를 두루 돌아본 것이 고작이고 이 여성들의 급료는 월 150~160달러를 받는데 이 금액은 체코에서는 그런대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인데 이 금액에서는 50%는 무조건 국가에 제공해야 한다.

30~40달러는 여관 숙식비로 공제되고 북한사람이면 누구도 예외없이 ‘충성의 외화자금’을 받쳐야 한다. 그 명목은 ‘김정일 생일 꽃바구니 값’ ‘원치 않는 북한영화 테입 값’ ‘백두산 혁명전적지, 사적지 건설지원금’ ‘김정일 꽃 온실 비품비’ ‘가축 및 남새(채소) 종자값’ ‘장군님(김정일) 만수무강 식품비용’ 등을 제하면 10~20달러 밖에 못 받게 된다.

공장 내에는 몽골이나 우크라이나, 체코 등의 외국여성들과 같이 일하는데 그들은 연실 음료수나 빵을 먹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여성들은 작업 중 마시거나 먹지도 않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가끔 빵이나 음료를 권하지만 ‘주체 조선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지침을 하달
한다. 고용기간 3년 내에 개중에는 영양실조로 월경불순의 현상이 많이 생기고 여성으로서의 체형을 잃는 여성들이 발생한다.

이렇게 피땀흘려 번 돈은 겨우 200~300달러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중 어떤 처녀는 또다시 외국에 가도록 지원 요청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1년에 100달러 벌기가 힘든 때문이라니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국땅에서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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