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호색

2005-05-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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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복식가)

자연계 생물들이 자기 보호를 위해 자기 환경에 맞는 색을 몸에 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과학 시간에 배운 것 같다. 배추벌레는 제 몸을 배추 빛깔로 하여 새의 눈에 잘 뜨이지 않게 하는 것처럼, 초잎에 사는 생물들은 거의 푸른색을 하고, 흙에 사는 생물들은 흙과 흡사한 색을 몸에 하고 있다.
청개구리는 초잎에 살아 푸르고, 산이나 늪에 사는 개구리는 흑갈색으로 얼룩 얼룩하여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무잎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것에 잡혀 먹히는 위험을 덜기 위한 수단도 수단이거니와, 자기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고운 빛깔이나 잘 조화된 멋진 빛깔을 입고 있다. 조류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곤충류를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자연계 생명들이 어떻게 그런 자기 보호법이나 빛깔로 자기를 표현할 줄 알까,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한데, 우리가 그것을 알기에는 불가의 말을 빌려 하면 그 이치는 비산수소지(非算數所知)이다.


인간들은 문화랍시고 조형이나 회화, 음악 등 여러 분야에 이루어 놓았지만 모두 자연을 형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 예술이라는 한계에서 그친다. 아무리 잘 그린 나뭇잎이 어떻게 실제 나뭇잎만 할까,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것을 새삼스럽게 자연 예찬론 같지만, 자연을 보면, 인위적인 조형물이라
도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그것이 아름답고 평화스럽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은 안주한다.
어느 유명 건축가의 말이 생각난다, 한 건물이 지어지는 데에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이 지
어질 때 저쪽 건물과 상대적인 조화미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환경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산다고 하면서, 현대에 사는 우리의 환경은
점점 그렇지 못해지고 있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쳐다보기 역겨운 건축물, 선전탑, 상점간판
들이 그렇고, 남을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차림. 때와 장소를 가려 입는 격식도
없고, 강한 원색을 입어 시각적으로 남에게 피로감을 준다든가, 색깔매치도 안되는 옷을 마구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인제 이 세상에는 복식문화라는 것도 점차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
다.
자연계 생물들이 그냥 아름답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들은 한결같이 조화가 잘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어떤 자연법칙의 질서를 잘 따르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
고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도 누가 묻지는 않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색깔을 잘 맞추어 입어서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을 미덕으로 하는, 그러한 도덕성이 우리 의생활에 강조되며 살아온 것은 무척 오랜 일이다.

디자인이 잘 된 그리고 빛깔을 잘 선택한 옷을 입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작은 마이너리티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센스가 있기도 하지만 옷을 잘 입는데 어느 정도라도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기 위해 전문가의 어드바이스를 듣거나,
매거진에서 혹은 아이 샤핑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스터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라던가, 자기 식의 편한 대로, 남에게 관계치 않는 옷차림이 보기 거북하게 만든다.

보기 역겨운 옷차림은 사람의 보호색이 못 된다. 자연계에 사는 생물들의 보호색은 잡혀 먹히는 위험때문이지만, 우리 사람의 보호색은 남에게 좋은 인상을 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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