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속 시원한 재보선 결과

2005-05-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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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 결국 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치 지도층이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복리를 위해 국사를 수행하기 보다는 정치를 자신의 권력이나 파당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 중기부터 멸망 때까
지 300여년간 계속되었던 사색당쟁이다.

당파싸움은 선조 때 이조전랑의 관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싸움으로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면서 시작됐다. 후에 서인인 정철의 처벌에 관해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고 북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한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원한 소북으로 갈라졌다. 그 후 인조반정을 주동한 서인이 권력을 누리다가 현종 때는 왕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고 숙종 때 장희빈의 몰락으로 남인에 대한 대숙청이 발생했다. 서인도 남인에 대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라졌다. 이리하여 조선시대의 권력쟁탈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사색당파라고 한다.


이 당파싸움은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일 뿐,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복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붕당정치라는 말처럼 정치판에서 한 패거리가 다른 패거리를 제끼고 권력을 잡아 자기네끼리 권력을 나누어 갖는 정치였다. 주로 복상문제, 세자책봉, 상대방에
대한 처벌 수위 등에 대한 견해 다툼이었으므로 국민의 복리와는 무관한 공론 싸움이었는데 매우 비타협적이었고 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왕을 자기 편에 끌어들임으로써 상대편을 말살하는 패거리 정치를 했으니 올바른 인재가 등용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당파싸움의 현상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의 주권자인 국왕이 오늘날에는 국민으로 바뀌었는데 정치파당은 갖은 감언이설로 국민을 속여 정권을 잡고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내세우는 슬로건이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민의
정서를 사로잡기 위해 감성에 호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지역감정이

대표적인 예이고 이런 정서로 집권한 YS, DJ가 모두 권력을 잡는데는 성공한 달인이었지만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일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이들 보다도 한술 더 뜨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이라는 엄청난 구호를 내걸고 느닷없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마구 쏟아 내놓은 정책이 국가를 안정시키고 국민을 화합시키기 보다는 혼란을 가중시키고 불안케 하는 일들이었다. 핵문제로 속
을 썩이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눈치를 보면서 미국에는 딴지를 걸고 과거사 논쟁과 행정수도 이전 등 국민과 지역간의 불화를 조성하는 일만 들쑤시어 만들어 냈다.

개혁이란 구호를 전유물처럼 들고 나왔지만 정말로 국가의 발전과 국민생활을 위한 개혁은 없었다. 그 보다는 안정된 제도와 역사적 사실을 파괴하고 허물어뜨리는 일에만 골몰해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른바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반대되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사람들의 과거까지 부관참시하는 지독한 보복의 냄새를 풍겼다. 참으로 사색당쟁의 후예 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지난 4.30 재보선에서 국민들은 진저리나는 이런 정치에 철퇴를 내렸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국회의원 6곳, 광역의원 10곳, 기존단체장 7곳 등 모두 23곳의 선거에서 한 곳도 이기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여당이 이렇게 참패한 선거는 한국정치사상 전례가 없다. 4.19 이후 민주당의 세상에서도 자유당 의원이 당선된 적이 있었다.

이런 선거 결과는 참으로 속 시원하다. 그것은 야당이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여당이 너무나 엉터리 정치를 해서 정치인에게 속아 넘어가기만 하여 어리석게만 보였던 국민들이 이제 뭔가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힘이 제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란 말이다. 앞으로도 코드니, 개혁이니 하는 말장난만 하면서 경제와 외교, 국방, 교육 등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집권당은 더욱 준엄한 국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당이 참패를 했다고 해서 이는 곧 야당의 승리인 것은 아니다. 국가와 국민 보다는 자신과 파당의 이익에 눈이 멀어있는 것은 야당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선거에서 몇 석의 의석은 늘어났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야당이 할 일은 여당의 참패에서 배우는 일이다. 붕당으로 갈라져 파당의 이익만 좇는 사색당쟁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국리민복을 위해 나를 버리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재보선의 승패 결과를 떠나 어느 정당이든 이 선거의 참교훈을 받아들여 반성하고 실천하는 정당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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