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에는 꿈을

2005-04-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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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희(시인)
이 곳 생활 꼭 42년이 되었다. 그만큼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바꿔진 무대와 배경에서 시간과 세월의 단막극 배역을 맡으며 달려온 그 세월을 봄이 오는 이 언덕에서 돌이켜 본다.학생으로, 시와 문학으로, 가족과 교육가로, 그리고 말미에 따라가던 민족시인이란 이름까지 가
슴에 달고 숨차게 달려왔다. 지금도 나는 시간을 자로 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우리는 보람되다 생각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다.
부지런히 우리 앞서 온 이민자들의 바턴을 받아 우리 뒤에서 기다리는 이민 후배들에게 우리의 땀 저린 사랑과 꿈을 물려주기 위해서. 그들이 좀 덜 힘들고, 좀 덜 외롭고, 좀 더 꿈꾸며, 더 성취감을 안게 되기 위해서. 한 때는 온 세상을 짐지듯 번뇌하고 괴로워하던 어리고 젊은 때와
이민사회 한 귀퉁이 성실하게 잡고 내 책임 다했다 자부하던 그 세월,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톨릭 현대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키 수녀는 이 세상을 유배생활이라 했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던 본향을 멀리 떠나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무는, 괴롭고 외로운 삶,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유배생활이다.
봄이 왔다. 뉴욕 거리에는 지금 봄이 제 빛이 되고 있다. 매년 보고 보는 거리의 가로수들, 길가에 피어있는 가지각색 자잘한 꽃들, 어느 봄이나 새롭다. 어느 봄이나 새롭고 경이롭다.
나는 올 봄 야릇한 향수에 젖어 있다. 오랜 추운 겨울을 지나고 너무 갑작스레 온 봄 탓일까,
내 심상은 멀리 떠난 그 어디쯤에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내밀한 기쁨에 차 있다.
이것은 자유인가, 행복인가, 아니면 가없는 고독인가.
아무래도 좋다. 봄이 온 것이다. 겨울을 잘 지낸 사람은 봄도 즐길 줄 안다. 사방에 넘치는 보
드라운 가로수의 잎들은 꿈을 꾸듯 자라고 있다. 아침마다 바라보는 창 너머 시시때때로 변하
는 연초록 바다, 연분홍이며 울긋불긋한 꽃들과 함께 바람에 일렁이는 저 물결, 가슴이 따뜻해
온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봄을 즐기고 있을까. 그리고 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도 생각해 본다.
어디서 우리는 봄을 잃어버렸을까, 개인의 감성의 일파 만파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유배의 세월에도 그에 맞는 도덕과 그 뒤에 숨은 이유와 뜻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유배
지 또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작디작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를 저렇게 놓았나 생각해 보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 작디 작은 존재, 풀잎 하나에도 의미를 주고 배후의 질서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들이 주는 풍요로움에 우리의 경이는 신비롭기까지 할 것이다.


오늘은 봄의 발걸음이 퍽 가볍고 당당한 것 같다. 봄의 그러한 자태는 벌써 봄이 등을 돌리며 떠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뉴욕의 봄은 너무나 짧다. 그 만큼 뉴욕의 봄은 색깔이 치장스럽고 향기가 짙다. 그러나 거동이 은근하다 하겠다. 깊고 은은한 한없이 넓고 큰 그 무엇을 우리에게 손짓해 준다. 꿈을 꾸라는 것이다.꿈은 꿈꾸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와 타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어떤 꿈이라도 좋으니 꿈을 꾸란다. 봄은 꿈꾸는 계절이란다. 너도 나도,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부산한 낮에도 어린 것 보채는 너절한 부엌에서도 꿈은 피고 있다고. 꿈은 우리를 기다리다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 줄 안다. 오래 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면 만약에 그렇게 앉아 시간을 낭비했다면 새로운 꿈을 꿀 일이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지구상의 비극 앞에서도, 개인과 자기 당의 이기와 욕심에 찌든 저 정치인들도, 가정이나 직장 어느 모임의 움직임이 못마땅해도 이 봄은 한번쯤 새봄의 꿈을 꿀 일이다. 그리고 퀸즈식물원 한국 밭에 나가 흙을 일구고 꽃 포기 하나, 나무 한 그루쯤의 꿈을 심을 일이다. 그 나무가 봄마다 꿈을 꾸게 할 것이다.
플러싱 거리에 달랭이 냉이의 장사 바구니가 나오기 전 나는 먼저 긴 겨울의 텁텁한 속내의를 벗고 새 봄의 꿈을 무상으로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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