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29폭동을 다시 생각하며

2005-04-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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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92년 LA에서 일어난 4.29 흑인 폭동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감독 김대실씨의 작품 ‘젖은 모래알(wet sand)’이 22일 YWCA 회관에서 상영됐다.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진 이 영화에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을 한인가게들이 흑인들의 무차별 난동으로 순
식간에 불덩이와 잿더미로 변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피땀 흘려 쌓아올린 한인들의 삶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고 흑인들은 한인 가게에 난입, 물품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해 갔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당시 한인들은 13명이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피
해액수 규모만도 약 1억 달러에 달했다.

당시 가게를 하는 한인 뉴욕커들도 어디서 흑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에 떨었으며 몇몇 업소들은 아예 문을 닫고 일찍 귀가해 버리기도 했다.
이 사건은 엄연히 백인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인데 화는 엉뚱하게 한인이 당한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폭동이 백주 대낮에 법치국가 미국에서 벌어졌단 말인가. 그것은 평소 한인들이 대부분 흑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도 그들을 무시하고 도둑 취급하기 때문이라는 평이다. 흑인들은 엄연히 이 나라의 둘째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들을 존중
하긴 커녕, 일부 한인들은 돈버는 일에만 몰두한다. 오늘날 한인들이 이만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상당부분 흑인들이 백인을 상대로 투쟁해온 결과이다. 데모하고 떠들고 온갖 구박과 멸시, 모멸감을 당하면서 흑인들이 백인을 상대로 싸워 얻은 혜택을 우리가 아무런 고생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많은 한인이 흑인촌에 가서 사업해서 돈을 벌고 있다. 이래저래 우리는 흑인들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인이 가게에 들어오면 얼굴을 환하게 하다가도 그들이 들어오면 눈을 옆으로 치켜뜨곤 한다. 또 백인이 들어오면 신경을 안 쓰다가도 흑인이 들어오면 마치 도둑이나 들어온 것처럼 위 아래로 훑어본다. 혹시 무어라도 훔쳐가지나 않나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다. 말
하자면 정작 가게에 와서 샤핑해 가는 고객이 흑인들인데도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도둑 보듯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걸 어느 흑인이 좋아하겠는가. 그것 뿐이 아니라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가게 앞에 캐딜락, 벤즈 같은 고급차를 세워놓는다. 귀가할 땐 철로 된 문을 이중으로 굳게 잠궈 놓고 다시 세워둔 차를 타고 백인촌으로 사라진다. 이를 본 흑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돈은 자기들한테 와서 벌고 살기는 백인촌으로 가서 산다? 그러면서 흑인들을 위해서는 뭐 하나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장사를 하면 할수록 흑인들은 울분이 쌓여 한인들 보기를 자기들의 터전을 앗아간 몹쓸 사람들로 생각한다.

창조주 신은 사람을 만들 때 마음이나 울분이 담긴 장기는 없어도 장기가 없는 가운데 마음은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은 우주다. 그래서 우리가 달 나라 건, 별 나라 건, 가보지 않았어도 생각하면 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란 공간도, 시간도 초월할 수 있
는 무한대다. 여기에 울분이 쌓이면 크나 큰 울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흑인들의 쌓인 울분이 얼마나 큰 것일지 상상해볼 수 있다. 쌓인 울분이 무한대라 자그마한 일에서도 몇 천 배의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불어 산다’는 말은 잘 하지만 더불어 사는 방법이나 지혜는 개발돼 있지 않다. 입으로만 잘 떠들지 이해관계가 조금만 상반돼도 더불어 안 사는 게 우리 한인이다.

우리나라에 막사이상을 탄 의사로 장기려 박사가 있었다. 그는 참 본받을 사람이다. 이북에서 가족 다 두고 자년 한 명만 데리고 남하해 왔다. 그의 철학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 복지병원 차려 돈 안 받고 진료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못된 정부 시책에 대해 울부짖고 애쓰면서 생
을 열심히 보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아이가 묻기를 “아버지는 왜 꼭 그렇게 하느냐? 가족을 좀 생각하세요” 하니 그의 대답이 “하늘의 뜻을 깨달아 남을 돌봐주면 하늘은 반드시 가족을 돌봐준다”라고 했다. 그런 정신이 바로 더불어 사는 정신이 아닐까. 이를 생각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방법과 지혜가 어떤 것인지 해답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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