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 꽃, 그리고 향기

2005-04-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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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교회)

봄에는 꽃과 향기를, 여름에는 열매와 잎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봄이 좋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이 아니며, 봄이 싫다고 봄이 늦게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때가 되면 봄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누구나 느낄 수 있게 봄기운을 품고 꽃으로 만개하며 온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산과 들과 거리에 봄은 스스로 봄의 향연을 열고 온다. 벌써 왔다가 가려는 봄 가운데 있으면서도 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바쁜 마음, 내 앞만 쳐다보는 마음, 복잡스러운 마음이 봄을 모르게 한다. 봄을 봄 되게 하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봄에 초라한 꽃은 없다. 사람이 초라하게 볼 뿐이다.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려고 꾸미지 않고 제 나이 속이려고 성형수술 하지도 않는다. 한 잎이면 한 잎대로 두 잎이면 두 잎 대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깊은 곳에서나 매연 뿜어내는 길거리에서나 억지를 부리지 않고 흐르는 봄기운에 꽃잎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나에게 주어진 것이 중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화사함과 밝음을 갖는 귀한 일이다. 보아주는 이가 없어도, 제 때 제 곳에서 피었다 진다 하여도 있게 하시고 기억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은 풍성함과 넉넉함을 깊은 곳에서 건져내게 한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갖고 바람도, 나비도, 새도 떠난지 오래 되었어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새싹을 돋게 한 이의 명령에 따라 버림받은 고목이었다 할 지라도 봄꽃은 달려 있다.꽃처럼 향기로 말해야 한다. 산들바람이 불어와도, 폭풍이 몰아쳐도 향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화려한 색상과 아름다운 모양으로 사람의 시선을 묶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땅 속 깊이 숨겨진
냄새의 비밀을 향기로 드러내야 생명이 있다. 비록 황제 꽃이 아니고, 뛰어난 운치와 절개, 은은한 기품을 의미하는 꽃이 아닐지라도, 시들어도 향기만은 추억이 되어 생각하면 할수록 오래도록 잊지 못할 향기로 남아야 한다.

아무리 가물다 하여도 독성을 품고 유혹하는 감미로운 향기가 아니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진하고 더 정직한 언어로 열매를 만드는 향기이어야 한다. 먹거리도 볼거리도 되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과 호의, 우정을 걸어 꽃말을 만들어주지 않고, 이름 없는 들꽃으로 시들어 간다 할지라도 만드신 이의 대화의 배달자로 그 분의 향기만은 꼭 전달하고 싶어해야 한다.‘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그 말이 이 봄에 더욱 가까이 와 닿는다.봄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꽃잎은 하나 둘 땅에 떨어진다.

등을 바닥에 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 보지만 결국엔 손을 들고 잠자리를 찾는다. 떨어지는 아픔이 있고,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꽃은 떨어져야 한다. 새 순을 위해, 열매를 위해, 나무의 자람을 위해 꽃은 떨어져야 한다.햇볕에 익숙할 때 몸은 건강해지고 어둠에 익숙할 때 정신이 건강해지듯 떨어짐에 익숙할 때 영혼은 건강해 진다.

비바람은 영혼을 위한 축복이다. 아쉽지만 꽃은 떨어져야 여문 영혼에 봄은 다시 오게 된다. 희생이 없이 살아가는 것 보다 희생의 자리에서 빛나는 넉넉함이 이 봄에 넘실거려 새롭게 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또 다른 날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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