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되살아난 ‘코리안타임’

2004-12-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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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준(취재1부 차장)

행사가 많은 연말이다. 타민족과 비교해 유난히 혈연, 지연, 학연 등의 모임에 무게를 많이 두는 한인들이니 만큼 연말 행사는 경기침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년 봇물을 이룬다.

이러한 수많은 한인 행사 때마다 항상 반복되는 문제가 역시 ‘약속’이다. 초청된 사람이 늦게 오는 건 그렇다 치고 주최측이 늦어 전체 행사 진행이 차질을 빚는가 하면 아예 예정됐던 행사가 최소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으리라 이해는 하지만 약
속을 지키지 못한 누군가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기는 건 분명하다. 또한 한인사회의 각종 행사가 열릴 때면 고민하는 문제의 하나가 바로 ‘행사부터’ 아니면 ‘밥부터’이다.


모두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빠듯한 시간을 내다보니 식사시간에 모임이 많아지고 또 모이다 보면 으레 약속에 늦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기다리는 김에 우선 ‘밥부터 먹으면서’하다 보면 행사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최근 플러싱서 열린 대규모 한인행사에 참석한 한인 인사는 이 ‘밥부터’ 때문에 낭패를 당했다. 꼭 참석해야 할 행사 2개가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열렸는데 밥부터 먹는 줄 알았다면 다른 행사에 먼저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금만 더 주최측이 신경을 써서 초청자들에게 행사 진행 계획을 시간과 함께 알려줬다면 이러한 낭패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한인 인사는 “저와 같이 이곳 저곳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약속’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제가 10분을 늦는다면 저를 기다리는 열 사람은 100분, 만약 백 사람이라면 1,000분의 시간을 뺏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과거 한국에서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우리의 후진 문화를 비꼬는 말로 유행된 적이 있었다. 선진국 사람들은 모두 약속을 잘 지키는데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되지 못해서 약속에 늦는다는 비꼼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이런 말을 쓰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한인 행사는 으레 예정시간 보다 늦게 시작하고 또 밥부터 먹고 시작하는지 아니면 행사가 끝난 뒤에 식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모두 바쁜 이민 생활이라고 한다. 그 바쁜 와중에서 서로 만남을 갖고 정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 한인 사회다. 여기에다 서로의 시간을 아껴주는
세심한 배려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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