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극·영화의 풍년가

2004-11-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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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들녘에서 풍년가가 들려오면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농토에서 바라던 수확을 얻게 되면 흡족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풍년·흉년이란 오직 농작물에 한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작물이나 창작물이 풍성한 양으로 생산되어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뜻으로 보면 올해는 미국에서도 한국 연극과 영화의 풍년을 맞이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여기서 감상하기 어렵던 한국 연극·영화를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다. 특히 연극의 경우, 극본·연출·배우 등을 비롯하여 연습이나 공연 장소와 시간을 짜 내기 힘든 여건 때문에 더욱 감상의 기회가 적게 된다.


그런데 금년의 경우는 어떤가. 한인 김은희 대표가 이끄는 비영리 극단 ‘서든 인라이튼먼트 디어터’가 공연한 ‘비무장지대를 넘어서’를 서두로 하여, 희곡 작가 김정미 씨의 연극 ‘위안부’, 극단 원화 21 대표인 연출가 김영순 씨의 ‘사랑의 약속’, 서울 예대 연극과 임형택 교수의 극단 서울공연예술난장의 안톤 체홉의 ‘세자매’가 무대에 올랐다.

이 풍요로운 연극 잔치는 그동안의 갈증을 촉촉히 적셔주었고 연극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재발견토록 하였다. 영상물과 달리 연극은 등장 인물과 관객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공연이다.

그들은 서로 호흡을 같이 하면서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이 지역의 특성상 등장 인물이 외국인이 되거나, 영어 대사를 구사한 연극들은 한국문화 소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어서 외국인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와 달리 제 5회 안톤 체홉 국제 연극 페스티벌에 참가한 ‘서울공장’의 ‘세자매’는 ‘아’와 ‘어’를 구별할 수 있는 한국어 대사로 시종하였다. 이는 보슬보슬 내리는 가랑비가 아닌, 세차게 쏟아지는 시원한 소나기였다. 역동적인 연출과 세련된 배우들의 연기는 연극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이들은 연극의 풍년가이다.

지금까지는 그것도 가끔 색다른 소극장에서 보던 한국영화를 대중 극장에서 장기간 감상하게 되었다. ‘쉬리’는 이미 옛날에 상영되었고,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장기간 상영되었고 관객이 극장을 가득 채웠었다. 이어서 ‘태극기를 날리며’가 몇 극장에서 선보이더니 드디어 뉴욕서 사상 최대 한국영화 잔치가 열리고 있다. 이는 링컨센터 영화제 ‘최신의 호랑이 : 한국영화 60년사’를 가리킨다. 28일간 월터리드 디어터에서 영화 40편을 마라톤 상영한다.

상영 일정표를 보고 꼭 보고 싶은 영화만 체크하여도 여간 바빠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영화 풍년이 아니고 무엇인가.어째서 이런 꿈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결코 별안간 생긴 일이 아니다. 지난 오랫동안 이 방
향으로 공을 쌓은 결과 얻은 수확인 것이다. 문화 수출은 이만큼 힘이 든 사업이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경향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살면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내 것만을 고집하게 되지 않는가.

그동안에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한국 내외에서 모두 힘을 쓴 결과이다. 한국문화에 접촉하면서 외국인들은 한국 전통 문화의 역사성·독특함·평화 사랑의 철학·한국인의 창의력 등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 인색했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결국은 자기 자신이나 고국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우물 안에 갇혀있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자기 평가에 서툴렀던 것이다. 각 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우열이 없고, 다르다는 차이점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점은 여러 문화가 섞였을 때 뚜렷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울리는 연극·영화의 풍년가를 들으면서 풍요로운 가을의 찬가 속에 가슴을 편다. 이 풍년가는 해를 거듭할수록 음량이 증가하며, 음색이 다양해지고, 세련되면서 세계 속에 울려퍼질 것이다. 한국문화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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