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중한 삶의 가치

2004-11-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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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박(법학박사)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살제로 연구하고 추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저 멀리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망원경으로 내다보며 말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만져보고, 매맞아 보고, 냄새를 맡아보아야 되는 일이다.
삶의 가치는 누구든지 죽음의 경지를 한 번쯤 왔다 갔다 해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삶의 가치를 귀하게 아는 것과 흔히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하는 방식의 가치관은 너무 쉽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오랫만에 한 후배 의사와 전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생은 많이 했지만 참 부러울 정도로 성공하였다는 후배이다. 소위 있을 것 다 있고, 오히려 너무 넘쳐보일 정도로 가진 것이 많아 보였다. 신앙생활도 본받을 만한 정도로 하는 자랑스런 후배로서
많이 노력하며 열심히, 그리고 참 멋지게 사는 자랑스런 후배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선배님, 나 그냥 하이웨이에서 콱 죽고 싶어요”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평소 그럴 때는 이유를 묻지 않는 성질이 있다. 꼬치꼬치 상대방의 어려움을 알아서 나를 흡족하게 하려는 마음의 태도가 싫어서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내 자신과 비교해 보았다. 사실은 “나도 그래” 하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괴로울 때와 뜻대로 안될 때 삶이 싫어진다고 한다면 뭐니뭐니 해도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래 여기 있다” 하며 구제의 손이 오는 경우는 들은 적이 없다. 생활고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것은 동정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잘 했다고 칭찬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병고로 생명을 유지하며 살을 깎는 듯한 고통으로 죽음을 앞두고 초를 다투며 아픔에 시달리는 환자의 경우 ‘차라리 어서 죽었으면’ 하는 동정, 또는 협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다시 말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빨리 안락사를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미시간의 의사 잭 케보키안은 시체 해부학 의사로서 많은 죽은 시체를 다루었고 정말 듣고 연구해서 죽음을 안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한 나머지 안락사의 방법과 도구를 만들었다.

세상 곳곳에서 병고에 몸부림치는 환자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죽음으로 연결케 하다가 법에 의해 현재 살인죄로 철창 신세가 되었는가 보다.
오리곤주나 미시간주는 주법으로 안락사를 인정해 왔는데 미 연방대법원은 몇년 전에 열띤 논쟁끝에 어떠한 미국의 법도 안락사를 다룰 미국의 법은 없고 이는 오직 하늘의 섭리이므로 이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였다.

이러한 고통이 원인이 된 자살의 협조 보다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와 희망이 없을 때는 누구든지 ‘자살’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선이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악을 다스리는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삶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를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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