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변산반도에 사는 사람들

2004-11-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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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바닷물이 빠지면 갯벌은 하염없이 누워서 등을 말리고 있다. 넓고도 넓은 등짝을 긁으며 밤
게가 햇빛을 즐기고 있다. 피로하고 지친 몸이라도 변산반도의 갯벌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
망의 그리움이 아득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살 맛이 생기면서 꿈이 또 생겨난다.
별반 값이 되지 않는 바지락을 줏으면서도 맑게 웃는 아낙들, 나는 변산반도의 해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였다.

지금까지 단 한번 마주친 적도 없는 저 사람들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근한 얼굴들이다. 한 마디의 말 조차 건네지 말고 그저 돌아서면서 가슴에 묻어두고 오래오래 나 혼자 기억하고 싶은 변산반도의 피부색이 검게 탄 아낙들.


나 뿐이 아니었다. 동행을 하고 있는 한미문학가협회 회장 김유인씨도 그랬고, 정성유학원장 정녀씨도 그랬다. 또한 낯선 길을 자세히도 소개하는 수필가 손태야씨의 생태학박사인 형부 조재창 교수와 손춘화 여사도 동생 손태야씨의 손을 잡고 갯벌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익계산서가 필요없이 온몸을 내어주고 있는 변산반도의 갯벌에는 표정이 필요 없는 맑은 눈빛만 있으면 된다. 만족한 눈인사의 맑은 빛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저 가르침, 머리를 숙인다. 인간이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생활의 터전, 유달리 고인들이 많은 이 지방의 한적한 길을 가다 보면, 나도 석기시대의 사람이나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유랑을 하다가 이곳에서 정착을 한 것처럼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가는 곳마다 손인사를 흔들어 보이면서 내 얼굴을 남긴다. 바닷물이 나가면 햇빛은 갯벌로 오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햇빛은 먼 곳으로 간다. 그래서 세상에는 만나면서 헤어지면서 생기는 그리움이 있는가 보다. 아무리 산천이 아름답고 바다가 아름다워도 생활의 터전이 되지 못하면 구경끝에 사람들은 그곳을 떠난다.

변산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 이곳의 갯벌을 어깨에 매기도 하고, 머리에 이기도 하고, 가슴에 묻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왔다. 생활에 필요한 자양분이 많기 때문이었다. 수고해서 찾아낼 줄 아는 생활의 자양분,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낸 수고의 자양분은 그들이 웃고마는 기쁨이었다.

우리는 무엇이든간에 대가를 치르면서 또 다른 대가를 기대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리움 하나 없이 흥얼거리는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처럼, 수고 없이 대가를 바라는 것은 생활이아니다. 바닷바람에 날개를 맡기고 나르는 갈매기의 심정이 낭만이 아니고 악세사리가 아닌 것처럼, 갯벌가에 사는 변산반도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갯벌은 낭만이 아니라 생활인 것이다.
생태계로서도 갯벌은 바다라는 몸에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인 것이다.
몇 만년을 거치면서 지구가 필요해서 일구어놓은 수백만평의 갯벌이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다.

내가 사는 조그만 집도 돈을 내야 살 수가 있지만 지구는 우리에게 집값도 요구하지 않고, 아니 전세값이나 사글세 마저도 요구하지 않고 무상으로 살다 가게 한다. 그걸 온전하게 보존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뜨면 되는데 어제도, 오늘도 파괴하고 내일도 파괴한다.

새만금 간척사업, 간척사업이 아니라 파괴산업이었다. 환경보호단체가 울부짖어도 말을 듣지 않는 국가와 업자들, 결국 유엔의 저지운동에 중단한 새만금 간척사업이었지만 벌써부터 갯벌은 망가지고 있었다.
세계의 보고에다 산을 깎아 흙을 덮고, 농토로 쓰겠다던 허울 좋은 계획마저 바꾸어 세계에서 제일 큰 골프장을 만든다니 가난한 삼신할매가 죽을 먹다가다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빨리 가고 싶지가 않았다. 되도록이면 천천히 가면서 이나마의 갯벌이라도 눈에 새겨놓고 싶었다. 소리는 가는 데에 재미가 있다. 빛은 목적지가 없어도 뛰고 본다. 그걸 우리는 누구나가 다 안다.
나는 갯벌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무슨 빛으로 무슨 소리를 내야 하나, 가슴만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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