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라톤이라고 한다면

2004-11-1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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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모두 뛰고 있다. 그 열기에 주위의 공기가 흔들린다. 공기 뿐만 아니라 연도를 메운 응원 인원까지 같이 흔들리다가 뛰다가 한다. 11월 7일에 열린 뉴욕 마라톤대회는 가을 축제 중의 백미였다. 참가 인원·규모의 크기·행사 소요 시간·행사가 주는 영향력·대중 문화로서의 인기… 등에서 그렇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목적이 있을 줄 안다.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인내심을 기르기 위하여, 행사를 즐기기 위하여, 기필코 완주하기 위하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연도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도 구경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참가하기 위하여, 참가한 친지를 격려하기 위하여, 행사를 즐기기 위한 것일 수 있다. 텔리비전을 보는 사람들도 역시 이와 같은 간접 체험을 즐기게 된다.


그런데 열기 찬 마라톤대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이 ‘삶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참가 인원 3만 수천명과 응원 인구는 지구촌 60억이 넘는 인구를 가리키고, 표준 거리 26마일 385야드는 사람의 한살이가 축소된 것으로 느껴진다. 마라톤 도중에 자의로 기권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처세술이고, 달리는 시간이 2시간 여부터 6시간 넘게까지 넓게
퍼져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속도라고 생각한다.

전속력으로 생애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생도 있다. 속도는 느리지만 끝까지 개인의 속도를 유지하려는 철학도 있다. 도중에서 불가피하게 행선지의 방향을 바꾸면서 새로움을 창출하는 에너지도 있다. 인생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가 책임지고 운행할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살다 보면 자의로 선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는 것도 사
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어 막다른 골목을 피할 수 있다.

또 마라톤대회를 자세히 살피면 갖가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선 몇 만명이 무리를 이루고 움직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 표정들이 다양하지만 모두 즐기고 있다. 연도에 늘어선 응원 물결도 볼만하다. 그들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국기나 표어판을 흔들기도 한다. 그 중에는 물을 제공하는 자원대도 있다. 이 행사는 달리는 사람과 응원하는 사람이 한
데 뭉치는 기회를 준다.

여기서 선두를 달리는 사람들은 혼자 동떨어져 뛰는 경우 보다 달리기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그룹을 이루게 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친구로 보인다. 그러다가 결승점에 가까이 가면 서로 속력을 내면서 등수의 차이가 생긴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들이 결승점을 지나면 서로 얼싸안으며 볼을 비비고 등을 다독거린다.

왜 그럴까.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었던가. 그랬었기 때문에 서로 감사하는 것이다. 만일 혼자 뛰었다면 속력이 덜 났을 것이다. 둘 혹은 여럿이 함께 뛰었기 때문에 속력을 더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일상 생활에서 귀찮은 경쟁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듯하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고,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결과를 본다면 경쟁
자는 협력자인 것이다.

매번 마라톤대회에서 감동을 받는 이야기는 장애자들의 참가이다. 이번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크리스찬 토레스씨는 6시간16분49초만에 결승라인을 통과하였다. 그가 움직인 방법은 오로지 팔을 이용해 휠체어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전진했고, 불굴의 의지로 목적을 달성한 숭고한 인간 승리의 모습이었다.

뉴욕 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하면 받게 되는 메달 여러 개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것들을 만지작리며 하나 하나에 깃든 추억을 더듬는 것이 즐겁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등수를 문제 삼지 않았고, 다만 완주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50이 가까운 그녀는 젊음과 인내심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마라톤대회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보는 각도에 따라 해석하는 심도가 다르겠지만, 군중 속에서 고독과 연대감이 교차됨을 즐길 수 있는 건강한 행사이다. 하여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긴 여정의 마라톤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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