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워싱턴에서 아틀란타까지

2004-11-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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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옥(전 고교 역사교사)

대통령선거 전 워싱턴에서 아틀란타에 이르는 중서남부의 여러 주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산하는 아름답고 길 주변은 깨끗하다. 집은 호화스럽지는 않으나 잘 정리된 잔디와 가꾸어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시설이 있고 수영장도 설치된 집이 많이 보인다. 공공시설을 이용할 기회가 적은 시골 자식들을 생각해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전형
적인 미국 ‘초원의 옛집’ 모습이다.

강냉이밭으로 둘러싸인 크지 않은 식당 앞에 노후된 몇 대의 차가 주차돼 있다. 점심을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니 비꺽이는 마루 위에 성조기가 걸려 있고 동네 백인주민들이 할 일을 마치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다. 외모가 뉴욕 슬럼가의 사람들과 차이 없어 보이는 그들은 환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삶의 여유도 있다. 동작은 느린 편이나 근면한 이들은 개신교를 믿으며 가정의 가치를 중히 여긴다.


낙태나 동성연애운동에 관심 없고 흑인이란 말은 써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란 긴 호칭은 생소하다. 흑인은 미워도 이웃 주민이지만 할로윈 때나 입을 옷을 입고 떠들썩하게 바삐 움직이는 아시안 이민자들은 상대하기 싫은 이방인들이다. 좋건 나쁘건 미국은 자기 나라임을 믿고 산다. 이 허술한 백인들이 이번 대선에서 부시의 재선을 가능케 한 장본인들이다.

뉴욕타임스 같은 권위있는 신문과 유명 정치평론가, 교수, 할리웃의 영화제작자들을 웃음꺼리로 만들고 대도시 시민들의 염원을 허황케 한 부시의 재선을 보고 놀란 케리 지지자들은 부시의 승리를 여촌야도로 폄하하지만 그러면 부시가 승리한 주에는 대도시가 없단 말인가.

오히려 미국적 가치를 거부하는 리버럴이나 그것에 익숙지 못한 새로운 이민자들이 다수인 대도시에서는 승리했다는 표현이 더 근사하다.부시의 승리를 가져온 미국적 가치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윤리, 도덕 면에서 공통점을 찾은 백인 선조들의 신념은 후세에 제도화되어 후세에 정치, 사회,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변화에 동의하면서도 선조들의 정신적 지배를 거부하지 않는다.

시청에서 발급받은 결혼증명서들은 동성연애자가 껴안고 입 맞추는 모습은 미국적 가치를 믿는 자에게 혐오감을 준다. 한 집 건너 도 한 집이 이혼가정이지만 그들을 보는 눈은 차갑다. 찬반으로 워싱턴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낙태문제도 그러하다.

이스라엘에서 폭탄을 안고 자폭하는 모슬렘을 남의 일로 지켜보던 그들은 WTC가 화염 속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테러에 대해 더 이상 방관자가 될 수 없고, 이에 싸우지 않고서는 가치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지휘자를 바꾸지 않는다는 선조의 경험도 기억한다.

미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에게 동정적이고 적에게 연약한 케리 후보는 이런 보수 백인들을 더욱 보수적으로 결집시켰다. 이런 상황이 이해될 때 부시의 재선은 예정되어 있었을 뿐 결코 놀랄 일이 못된다.

민주당 후보 지지표가 많은 해안가 주 대도시에 집중해 있는 새로운 이민자 우리들은 미국적 가치를 이해 못하거나 해도 잊고 사는 듯 하다. 양질의 노동력 소유자로 미국에 기여하고 있다 자부하지만 그것을 잊거나 저버릴 때 백인들에 적대감을 줄 수 있다.

부시의 재선으로 강경파의 득세를 염려하지만 미국의 극단적 호전파가 우리가 떠나온 나라의 평화주의자 보다 훨씬 더 온건적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에서 미국적 가치를 정립시키고 그 전통을 이어가는 힘 있는 집단이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개신교를 신봉하는 백인 앵글로 색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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