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상식의 그늘

2004-11-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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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취재2부 차장)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 70줄이 넘어선 그분은 한국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지금 노무현 정부가 좌파라서, 빨갱이라서 큰 일”이라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걱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울분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정치 얘기를, 그것도 나이드신 분이랑 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냥 넘어가려다 한마디만 물었다. “어떤 면이 좌파인가요.”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대통령도 그렇고, 주위에 386세대라는 젊은애들이 전부다 빨갱이란
다.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집권층이 좌파니까, 나쁘다는 것이다.
그분이 원래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에 쏠려있거나, 막말로 무식한 분이었다면 할 수 없겠지만, 연세에 비해 소탈하고, 허례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하며, 상식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허탈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대부분 현 정부의 경제 기조는 오히려 우파적이라고 평가한다.정치이념적으로도 과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보이지만, 실질적인 정책 기조가 과거와 크게 다른 면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일부에서는 좌파라는 말로--그 좌파라는 표현이 아직도 한국에서는 빨갱이와 동의어 수준으로 쓰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매도를 하는 지 이해를 못할 때가 많다.일종의 화풀이 수준이다. 왜 화풀이를 해야 하는 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개개인의 사고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들이 하나의 편견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모 언론사가 주최한 보수 이론 무장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미 ‘현 정권=좌파’, ‘좌파=빨갱이’의 공식이 머리에 박혀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론이 더 필요할까 싶지만.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믿고 싶은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은 항상 옳으며 상식적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상식을 갖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남들이 들어도 충분한 근거와 증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각자의 상식에 따라 사람간에 ‘사고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또 그 ‘사고의 차이’마저도 인정할 수 있어야 정말로 상식적인 것이 된다.날씨가 쌀쌀해지면서 한국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보다 씁쓸한 얘기가 들려와서 잠시 울적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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