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 말은 하고 살아야하는데

2004-11-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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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할 말은 많은데,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사근사근 말을 잘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 말은 못하고 끙끙대는 내숭형일 수 있다. 시원하게 말을 해버리면 좋을텐데 혼자 속으로 끌탕을 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밤을 지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은, 즉 의무는 잘 이행하면서 권리행사는 잘 못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늘 손해만 보며 사는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할말을 못하는 경우, 자신의 성격이 욱욱 하여 말을 하면 싸우게 되는 사람이 있다. “전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이러이러한 것은 개선 해 달라” “이것은 타당하고 저것은 부당하니, 부당한 것은 타당성 있게 조치해달라” 혹은 “나의 형편이 이러이러하니 형편을 보아달라” 또는 “형평성에 문제가 있으니 좀 더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달라”등등 조리 있게 정
당하게 합리적으로 말만 할 수 있다면 별 문제는 생기지 않고 손해도 덜 볼 것이다. 해결의 방향이 대화를 통해 서로 전달되어져 개선의 여지가 생길 것이기에 그렇다.


흔한 말로 “울지 않는 아기 젖 안 준다”란 말이 있다. 말을 바꾸면 “우는 아기래야 젖을 준다”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가장 잘 해석되려면 요구사항이 있으면 싫으나 좋으나 자꾸 보채야 한다는데 그 요점이 있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자신이 부당함을 알았을 때, 그 부당함을 얘기해야 상대방도 이해하고 그 부당함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얘기를 하지 않으면, 즉 울지 않으면 그 부당한 대우는 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럴 때 그 부당함을 알고 형평에 어긋나지 않게 대우를 공평하게 해준다면 문제는 없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울지 않는 아기만 쫄쫄 배만 곯게 된다. 그러니 할 말은 하고 사는게, 부당함을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게 하는 한 방편이 된다.

실제의 경우 착한 엄마, 된 엄마는 아기가 울지 않더라도 젖을 시와 때를 맞추어 아기에게 주는 엄마가 진짜 엄마이다. 아기가 울지 않는다고 며칠을 굶겨 보라. 아기는 굶어 죽을 수 있다. 굶어 죽게 되는 아기를 보며 울지 않는다고 젖을 물리지 않는 엄마는 가짜 엄마이거나 이름만이 엄마일 것이다. 부성보다 모성이 강한 것은 자식은 엄마의 배를 찢고 나온 엄
마의 분신이기에 그렇다.

세상 속의 관계에서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말을 못하는 사람을 아기라 비유하고 말을 안 한다고 부당한 처사를 알면서도 묵인해버리는 권력자를 엄마로 비유함은 잘 맞지 않는 비유이지만, 어찌했던 할 말은 하고 사는 게 현명하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현실 또한 우울하게 하는 실상인 것만은 사실이다.

일상사에 일어나는 일들에 머리가 지끈할 때면, 우주를 생각하곤 한다. 드넓은 우주,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우주.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 없는 우주. 너무나도 큰 우주의 매력에 빠져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좋다.

우주를 생각하다 보면 사람이 사는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를 알게 된다. 우주에 비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이 100% 의지하며 돌고 있는 태양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우주에 비겨 “콩알만한 지구” “콩알만한 태양”으로 견주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 큰 우주에 떠 있는 작은 콩알만한 지구에 살면서 “부당하니 처우를 개선해달라, 말을 해야하나, 안 해야 하나” “울어야 젖 주지”같은 것에 얽히어 머리를 지끈거려야 하니 얼마나 모순이 큰지 모르겠다.

우주를 생각하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은 좋으며 세상살이 돌아가는 모순된 모습들에서 멀어지려는 것만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탈출은 될 수 없고 더 좌절로 빠져 들게하는 촉매 역할이 될 수도 있다. 그 이름이 바로 ‘허무’다. 허무한 생각을 갖고 세상을 향해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나!”한다면 곤란하다. 지구를, 태양을, 콩알로 보아 우주의
큰 틀 속에서 놀아봄도 좋다.

허나 살아있어 숨을 쉬고 있는 한, 우주의 저 먼 곳까지 가 쉴 수는 없다. 다시 자신의 발 밑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할 말 못하고 끌탕만 하는 사람보다는우는듯 보채며 제 살길 잘 빠져 찾아가는 사람들이 더 현명한 것을 우주는 긍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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