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호질(虎叱)

2004-10-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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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권(동부제일교회 목사)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 정조 때 북학파(청조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함)의 거두였다. 청나라를 다녀온 뒤 저작한 ‘열하일기’로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생활의 기구들을 편리하게 하고 생활경제를 윤택하게 하여 생계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철학을 주장한 실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의 저서 ‘연암집(燕巖集)’에는 ‘허생전(許生傳)’을 비롯한 총 12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과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편명만 있을 뿐이다.

그가 실학자이면서도 이런 작품들을 모두 한문으로 저작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적 부조리를 여지없이 폭로하여 유교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에서 실학(實學)을 역설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

특별히 ‘호절(虎叱)’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유도(儒道)의 위선적 가면을 폭로하는 한편, 삼강오륜(三綱五倫)이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것임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정지읍(鄭之邑)에 북곽(北郭)선생이라는 분이 살았다. 그는 스스로 저작한 책이 일만권이나 되었고, 구경(九經)의 뜻을 풀이하여 다시 쓴 책도 일만오천권이 되어서 임금과 신하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그 읍의 동쪽에 수절하여 임금에게 가상히 여김을 받고 제후들에게 그의 현숙함을 칭찬받는 동리자(東里子)라는 과부가 살았다. 그녀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그 아들 다섯의 성이 실은 각각 달랐다고 한다.

동리자에게 정을 두고 사통(私通)하던 북곽선생이 다섯 아들에게 들켜 도망하다가 들녘의 똥구덩이에 빠졌다. 겨우 똥구덩이에서 나오는데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신랄하게 그를 꾸짖었다. 북곽 선생은 호랑이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다. 호랑이는 북곽 선생의 겉과 속이 모두 더럽고 냄새나서 그의 앞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를 피하여 가버렸
다.

북곽 선생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하여 엎드려 자기를 변명하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해가 돋아 농부가 일하러 들에 나왔다가 그렇게 빌고 있는 북곽 선생을 발견하고 그의 앞에 섰다. 북곽 선생은 여전히 자기를 변명하며 빌었다.>고명한 사람의 위선은 너무도 더럽고 냄새가 나서 호랑이도 그런 사람은 안 잡아먹고 피한다는 것이다.예수도 위선과 의식을 악한 죄로 여겼다.


그리하여 외식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기록하여 옷깃에 달고 다니던 경문을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임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크게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존경받고 대접받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지도자들이 위선과 외식으로 부패하면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더럽고 냄새가 나게 된다.

사도 바울도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점을 경계한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남은 구원을 받게 하고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했다(고전9:27).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런 경계심마저 마비된 교회 지도자들이 적지않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는데 교회의 심각함이 있다 할 것이다.
오늘 밤 호랑이가 나를 만난다면 과연 나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자일까, 아니면 호랑이까지도 코를 막고 피하는 자들 중 하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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