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과 여당에 바란다

2004-04-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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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준(전 언론인)

고국에서 치러진 총선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며 끝이 났다는 소식이다.
열린 우리당이 소신껏 활동할 수 있는 과반수 이상 의석을 차지하고, 바닥을 헤매던 야당이 그래도 거대 야당을 견제할 수 있는 의석을 얻는것으로 끝이 났다.

이번 총선은 의정 대표를 뽑는 것이 아니라 탄핵정국에 휘말려 노대통령 재신임의 의미가 담긴 선거였다고 한다. 1년 후 부정선거로 인한 재선거가 여러 곳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아무튼 국민으로부터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노대통령과 여당에 바란다.


한 나라의 경영은 정치가라는 수준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 정치 몇 단이니, 가신이니 PK, TK니 하는 패거리 정치꾼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꾼에게는 기(技)와 술(術)과 사(詐)는 있어도 덕(德)과 인(仁)과 도(道)는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남에겐 너그럽게, 자신에 대해서는 엄할 때(待人寬 之身嚴) 생겨나는 인과 덕의 덕목은 희귀 품목이었다.

자기 자신은 선(善)이고 남은 선이 아니라는 이분법적 사고 아래에서는 덕과 도를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옛부터 덕을 다스림의 최선에 두고, 도를 진리의 궁극에 두었다.

옛 임금들은 가뭄이 심해지면 자신이 부덕하여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 돌리고 베옷을 입고 맨발로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으며 수라상의 반찬 가지수를 줄이기도 했다.

또 더위를 피해 모자를 쓰지 않았고, 부채질을 금했으며 도살(屠殺)은 물론 관마(官馬) 먹이로 곡식을 쓰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단식 등의 깜짝 쇼가 아니라 극도의 자기 절제의 실천이었다. 조선조 태종 방원은 형제를 죽이는 피의 투쟁 속에서 승리하여 대권을 잡았지만 ‘부덕의 소치’를 스스로 깨닫는 즉시 세종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물러앉았다.

태종은 정권 말기의 극심한 가뭄을 자신의 부덕으로 읽었고, 돌아선 민심을 하늘의 뜻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지혜로운 왕의 지혜로운 결단이었고 조치였다.

고국의 신문기사를 보면 태종 말기적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 실업은 천정부지인 데다가 신용불량자는 날로 늘어나고, 하루에 수십 건이나 주부들이 가출을 하고 부부싸움 끝에 택시운전기사가 철길을 달리고, 부부싸움에 화가 난 어미가 생후 5개월 된 아들 두 다리를 잡아 팽개쳐 죽게 하고, 고등학생이 자기 라면을 먹었다고 화가 나 아버지
를 칼로 찌르고, 성폭행 당한 학생을 경찰이 성폭행을 하는 도덕적 타락과 자고나면 생활고에 자살 소동이 일어나는 온통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 듯 하다.

노자는 <억지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爲無爲 見無不治)고 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낮추기를 잘 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정치는 물 흐르듯 해야 하고, 가장 나쁜 정치는 국민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지도자가 백성들로부터 업신여김 당하는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은 총선 승리에 고무되지만 말고 지난 날의 교만과 아집으로 인한 실수를 참회하고, 자신의 주변에는 보다 엄격하고, 자신의 집착을 버리고 국민 앞에는 좀 더 솔직해져 이 난국을 해결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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