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다 성숙한 사회를

2004-04-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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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전 코이노니아 편집인)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산에서 나온 거친 돌로 옥을 간다는 말인데 군자도 소인들이 하는 짓을 보고 배울 것이 있다는 뜻으로 쓰여진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교훈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한국의 탄핵 정국이 바로 그것이다.아직도 우리가 이런 수준이었나 하는 점이 부끄럽지만 이 쯤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새로운 교훈을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는 속어 중에 ‘최뿔딱 강고집’이란 말이 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보니 특정한 성을 지칭한 것은 어감상 가장 알맞아서 그런 것 뿐이고 대체로 우리 한국민 모두가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 우리가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하였을까? 아마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겪어야 했던 극심한 외세의 간섭과 일제 강점기의 영향, 그리고 단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이런 독특한 성질이 우리에게 더 보태어진 것 같다.

알젠틴의 한인동포들이 처음 정착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은 우리 동포들이 작지 않은 그 나라 의류업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실과 천을 생산하는 것에서부터 도매업과 지방 소매업까지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차지한 것이다.

70년대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어 80년대에 이룬 성과이니 실로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70년대 초 주로 공무원, 교사, 회사원들이 주축이 되어 이민 간 알젠틴에서 그곳에 살고있던 소수의 한국전쟁 포로들의 도움으로 봉제업에 손을 댄 것이 시초였다. 유대인과는 크고 작은 마찰이 많았다.

처음에 유대인의 의류공장에서 일을 가져다가 하청일을 하였는데 이들이 처음에는 현금으로 결제를 하다가 한 철의 일이 끝날 무렵에는 으례히 한두달 정도의 수표로 결제하려고 하였다. 극심한 인플레 때문에 두달 수표면 30~40%의 실질 가치가 하락할 때였다.

한인들의 대응 방법은 대략 비슷했다.가족들을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데려다 놓은 가장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튀어나오는 것이 그냥 한국말이었다. ‘이 개새끼 죽여버리겠다’ 팔소매를 걷어부치고
달려들면 그들은 무조건 뒤로 물러섰다. 사생결단 하겠다는데 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싸운 뒤의 태도가 서로 달랐다. 한달 정도 뒤, 다시 일이 시작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웃으며 찾아와서 현금 결제할테니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한인들은 거절하고 다른 공장을 찾았다. 그들은 이익과 필요 앞에는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고 우리는 이익과 필요보다도 감정이 더 앞섰다.


그곳에는 상당수의 일본인도 있는데 그들은 알젠틴의 화훼 분야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 이웃에 공동체를 이루고 꽃농사를 짓는 그들인들 왜 다툼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신년 등 그들의 경축일에는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3.1절 행사도 한인회 파와 대사관 파가 따로 모여서 했는데 말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낯선 이국에서 처음 삶의 터전을 닦아야 했던 60~70년대에는 이런 저돌적인 성질이 성과를 보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인 은근과 끈기를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감정을 너무 앞세우는 일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리고 국가까지도 어렵고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사회가 변화와 개혁을 이루면서 잘못되지 않도록 보수세력의 견제를 받아야 하는데 모두가 감정의 폭풍 속에 휘말려서 이성을 잃은 판단을 할 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다.

이제 우리 사회가 미스터 뿔따과 미세스 고집들 보다는 은근과 끈기라는 우리 민족의 옛 정서를 다시 회복해서 대화와 설득을 통해 화합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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