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평화의 씨앗

2004-04-13 (화)
크게 작게
지난주는 부활절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고통 속에서 구원한 부활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
고 지구촌 모든 인간에게 사랑과 평화, 소망과 기쁨을 골고루 전한 뉴스 중에 꽃 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지구상은 매일같이 시끄럽고 혼란한가. 인간끼리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국가간에 서로 총을 겨누고 죽고 죽임을 당하면서 귀중한 목숨이 곳곳에서 파리목숨처럼 사라진다.


당장 이라크전만 보아도 이라크 저항세력과 미국간의 보복과 대항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11일 팔루자에서는 미군과의 전투로 700여명의 이라크주민과 수십 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참상이 야기됐다.

이라크 저항세력들은 미군이 철수하지 않을 경우 대 항전을 하겠다는 최후 통첩까지 하고 나서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이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결과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종족간에 싹튼 증오와 적대감에서 비롯된다. 쉽게 말하면 나는 인정받고 싶은데 상대방이 인정을 안 해주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
건과 문제의 요인은 바로 이런 편견에서부터 시작된다.

9.11 테러를 보아도 저변에는 이슬람과 기독교도간에 빚어진 종교적 이해관계, 즉 천대와 멸시를 당한 이슬람 세력들의 보복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지구촌의 200여 모든 국가는 각기 다른 종교와 문화, 언어,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중에서 만일 어떤 한 민족과 나라가 내 것만 주장하면 평화는 깨지게 되어 있다. 모자이크는 형태가 다른 모든 것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구촌의 평화는 각 나라의 문화배경, 종교와 언어, 그리고 서로 다른 특징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공존 공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마치 서로 다른 음의 악기가 하나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나 각기 다른 맛의 야채가 섞여 맛있는 샐러드 보울이 되는 것과 같다. 지구상의 평화는 ‘나는 살고 너는 죽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원칙인 상호공존에 입각해 다같이 노력하며 서로 사는 방향으로 가는데 있다.

한국의 지역갈등과 있는 자와 없는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도 다 이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정치싸움도 내 의견과 다르니까,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 가는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 사회 집단, 국가와 민족간에도 편견이 있으면 바람 잘 날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되는데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따돌리면 문제가 생겨난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건 치열한 분쟁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모든 우리의 생존권 싸움도 결국은 나만 살려고 하는 편견과 독점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나만이 좋은 것을 갖기 위해 나머지 사람이나 집단, 국가는 왕따 시키고 미워하고 따돌린다. 소외된 자와 민족은 결국 희생타가 되어 증오심을 갖거나 목숨을 끊지 않으면 굶주림과 기아에서 허덕이다 종국에는 마치 아프리카 국민처럼 버려지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에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소외돼 버려진 노숙자들이 수없이 거리에 넘쳐난다. 이는 모두 있는 자와 배운 자, 강자에 의해 따돌림을 당한 끝에 생겨난 결과이다.

편견은 결국 왕따와 소외감을 낳고 따돌림은 증오심과 적대감, 분노와 복수심을 유발한다. 그 결과 지구촌에는 기아와 빈곤, 자살자가 속출하고 국가간의 다툼과 분쟁으로 화약냄새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 약한 자, 힘없는 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나한테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이 이 지구촌에 퍼져 더 이상의 다툼과 분쟁,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