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공인(公人)

2004-04-09 (금)
크게 작게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망신을 당했다. 일본 후쿠오카 지방법원이 7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 규슈 7개현에 거주하는 종교인과 재일 한국·조선인들 211명이 총리의 신사 참배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총리와 국가 상대로 청구한 소송에 지방법원이 내린 판결로 당장 법적 구속력은 없고 최종심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일단 일본 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은 처음이다. 이후 각종 소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적 생명, 최근 일본사회에 일고있는 극우 조류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그 의미가 깊다.

이 후쿠오카 지역은 근현대 들어 우리 민족에게 영욕의 역사를 안겨주고 있는 곳이다. 후쿠오카 지방재판소는 지난 2002년 4월에도 태평양전쟁 중 외국인을 강제 징용한 일본 기업의 불법 행위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들어 손해 배상명령을 내린 판결을 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 후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형을 살다가 1944년 6월 옥사한 곳이 후쿠오카 형무소다.

문제작 영화를 잘 만드는 김기덕 감독이 영화 ‘나쁜 남자’로 2001년 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 대상을 거머쥐었는가 하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격인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 극우단체 겐요사 출신으로 바로 겐요사 기념관이 후쿠오카 시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하여튼 후쿠오카 지방법원의 판결 요지는 얼마나 통쾌한지 공인(公人)이라면 누구나 귀담아둘 필요가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야스쿠니에 참배할 때 공용차를 이용했다. 비서관을 수행토록 했으며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라고 기재했다.”즉 총리가 신도 관할구역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 ‘국가 및 국가기관은 종교 교육과 기타 어떠한 종교 활동에도 참가해서는 안된다’는 헌법 20조 3항을 위반한 것이라는 판결이다.

그런데 그는‘참배는 개인적 신조’라며 계속 신사참배를 고집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핵심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돼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이곳을 참배한 사실에 대해 중국은‘총리의 신사 참배는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며 참배 중단을 요구하고 한국은 “지금도 정신대 할머니들은 한을 씻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한
역사 앞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며 거듭되는 유감을 표시하고 있으나 고이즈미는 취임이래 4차례나 이곳을 찾는 등 독불장군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인‘개인 자격’은 어불성설인 것이 그는 개인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내각 총리대신 자격으로 그곳에 간 것이다.진정 개인 자격으로 갔다면 걸어서 가던지 택시를 타고 가야했고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주
는 비서관 대신 혼자 갔거나 가족을 동반했어야 했다. 방명록에도 관직 없이 자신의 이름 석자만 썼어야 했다.

일제 침략으로 36년간 식민지통치란 뼈아픈 역사를 지닌 한국은 물론 태평양전쟁 피해 동남아 국가들을 도탄에 빠트린 과거를 지닌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라는 자가 공적 업무가 아닌 사적 용도로 그 관직을 이용한 것이다.
무릇 공인 된 자는 참으로 처신이 어려운 것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잘 구별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한인사회에서 공인은 누구일까. 공공기관은 물론 단체나 협회의 회장도 공인일 것이며 전문직을 비롯, 동포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람도 공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직함이나 공적 업무 때문에 만나고 연결되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예지만 자신의 결혼, 부모 칠순 혹은 장례식, 자녀 돌잔치 또는 결혼식에 청첩장, 초대장, 부고장을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지, 친구나 이웃을 불러 치러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이 좁은 한인사회에서 공적인가, 사적인가의 잣대를 따지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이 일이 민폐를 끼치는 일인가 아닌가를 따져보면 금방 그 답이 나올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