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시산 수시수 (山是山 水是水)

2004-04-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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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건축가)

1980년대 초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뒤 한국이 어수선할 때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는 해인사에 칩거해 계시던 선사(禪師) 이성철 스님을 찾아가서 종정(宗正)으로 취임해 주실 것을 고했다.

평생을 속세와 담을 쌓고 사셨던 스님은 거절하셨다. 그러나 조계종 관계자들은 “오늘날 어수선한 불교계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스님의 이름이 필요하니 꼭 취임해 주실 것”을 강청했다. 마침내 스님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아서 종정 취임에 임하게 된다. 절대로 총무원 회의에 참석 않고 해인사를 떠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취임사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 취임사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한 줄의 취임사가 많은 세인들에게 회자되었던 이유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를 대선사가 했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분명히 그 속에 깊은 뜻이 있을터인데 그 뜻을 몰라서 설왕설래했던 것이다.

본래 이 말은 성철스님의 말이 아니었다. 약 700년 전에 중국에서 <금강경 오가해(金剛經 五家解)>라는 책이 다섯분의 큰 스님에 의해 씌여졌는데 그 속에 야보스님의 이런 시가 등장한다.

“산시산 수시수 불재하처(山是山 水是水 佛在何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대체 부처님은 어디에 따로 계신다는 말인가” 성철스님은 이 시의 앞부분만 인용했던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왜? 불교는 자력(自力)종교인데 반해 기독교는 타력(他力)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반된 두 종교이니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이라마의 지적처럼 진선미(眞善美)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 속에는 동일한 속성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야보스님의 이 시는
그 동일한 속성을 잘 표현한 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산을 산으로 물은 물로 즉, 자연현상을 자연현상 그대로만 인식하는 단계는 첫번째 단계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두번째 단계가 펼쳐진다. 불교의 핵심은 우주만물의 근본이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을 만나면 산은 더 이상 산일 수 없고 물은 물일 수 없게 된다.

인간이 평소에 지니고 있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가치체계에 일대 전도현상이 일어나는 단계가 이 두번째 단계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단계를 견성(見性)이라 한다. 만물의 근본을 보았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경지인데 이는 반드시 법열(法悅: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때를 가장 위험한 때로 본다.

왜? 겨우 구도에 입문한 단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佛者)들은 마치 자신이 완성된 사람인양 착각하며 자비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독선적이 될 때가 이 때이고 진리를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그 삶이 진리와 가장 무관할 때가 바로 이 견성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다음 단계로 성숙되어 가야 하는데 바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되는 단계가 펼쳐지는 세번째 단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첫번째 단계로의 환원이 아니라 그 산과 물은 부처님의 불성을 지닌 불법의 한 양상으로써 인간이 동반자로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단계이다. 불교에서는 이 때를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자기 이기심을 위한 삶이었지만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들의 삶의 모든 행위가 구도의 행위요, 남에게 보시하기 위한 삶이 된다. 따라서 야보스님의 시나 성철스님의 취임사의 말씀은 “왜 너희들은 불당 안에서만 부처님을 믿는 신자로 살려고 하느냐.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 불자가 되지 아니하면 참된 불자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였던 것이
다.

옛날, 멀리 중국에까지 불법으로 명성을 떨쳤던 원효대사가 작은 절간의 볼품없는 곱추 방울스님의 삶의 모습에서 더 큰 도(道)를 얻어 세속으로 돌아간 이야기, 생사의 고비, 험악한 폭풍 속 갑판 위에서 동요치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무명의 젊은 형제와 기도 없이 안절부절하던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고 크게 뉘우친 요한 웨슬리 목사가 훗날 세상을 변화시킨 이야기,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를 예수 사랑으로 만들어 ‘땅끝’을 건져올리며 물질적 축복까지 한몸에 받고 있는 멜 깁슨을 생각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전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사행 12:8)”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 남기신 유훈이다.

약 12년 전, 1992년 7월 1일, 진리의 빛이신 성령님께서 하늘 위 구름 속 비행기 안에 있는 나를 찾아주셨다. 그 사랑! 그 위로! 그 기쁨! 그 감격!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날들을 나는 부채감으로 들떠 내 삶의 현장을 경시하고 ‘땅끝’과 ‘증인’에만 집착했었던가. 하지만 그 때마다 성숙의 단계를 지켜봐 주셔서 “가정과 일터,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땅끝’은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부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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