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쟁과 지도자

2004-04-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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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선(브루클린)

요즈음 한국 정치인들의 지나친 이기주의적 말과 행동을 보면 흡사 조선왕조의 당쟁사를 보는 것 같다.

지난 반세기간에 금욕과 명예욕, 그리고 권력을 쫓아 부침하며 정계로 모여든 정객들이 서로 물고 뜯고 할퀴며 죽이고 죽는 역사를 기록해 왔다.소수의 정객들을 제외하고, 이들은 국익과 국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리사욕, 당리당략에만 혈안, 집착해 이전투구한 게 아닌가.


그런 싸움의 시작이 동에서 시작되었건 서에서 시작되었건 잘못 꼬여 지역감정이라는 산맥으로 융기해 동과 서를 가로막고, 동에 살던 사람이 서에 가서 살아도 서에서 태어난 사람이 동에 가서 살아도 자식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아르릉거리며 그 벽을 아직 다 허물지 못하고 있다.

아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의 당쟁은 선조(1567~1608)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명분이 왕조의 대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고, 권력 장악을 위해 아집과 편견으로 비난 성토하면 변명과 보복으로 맞받아치는 치졸한 싸움이었다.

관직을 차지하려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조선왕조의 사림(士林)들과 전대(前代) 때부터 왕조에 공을 세웠거나 왕족들의 일파인 훈구대신들의 대립으로 시작된 무오사화를 거쳐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 중종반정을 거쳐 기묘, 을사사화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생사를 건 힘 겨루기의 반복으로 이어지다 사림이 훈구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승자가 된 사람들 속에서도 분열이 생겨 서로 헐뜯고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당쟁의 시초인 것이다.

당쟁은 처음에 자리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 같이 큰 자리는 아닐지 모르지만 조선왕조 이조에 전랑(詮郞)이라는 직이 있는데, 이 전랑은 관리의 임명, 면직권을 장악하고 있어 자기편 당의 세를 불리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또한 재상이 되는 지름길이었기에 사림들 사이에 쟁탈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전랑직을 놓고 서울 동쪽에 사는 김효원과 서쪽에 사는 심의겸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당쟁 초기에 동인의 득세로 서인을 압도하다 동인 중에 서인에 대한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리어 남인, 북인으로 대립되었다. 이후에는 이러한 파가 파를 낳고, 파는 또 갈라지고 갈라져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마치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해타산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고, 이리 모였다 저리 모였다 하며 이합집산하는 복잡한 정치 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지금의 정치, 정치인, 정치집단이 그들을 답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참담함에 몸서리 쳐지고 있다.

탄핵정국 이후에 불어닥친 두려움은 북의 남침도 아니고 경제파탄도 아니요, 사회혼란도 아니었다. 서로 제 잘난 탄핵 반대와 찬성이라는 엇갈린 꽹과리를 두드리는 듯한 목소리들이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었다. 야당과 여당의 분열이 아니고, 국민과 국민의 분열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분열로 노론과 소론이 한 치 양보도 없는, 인터넷 세대와 비 인터넷 세대간의 분열된 대립인 것이다.그런 분열과 대립의 망국적 뿌리가 조선왕조 당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당쟁의 유전인자가 민족의 의식 속에 남아있다 다시 살아났다면, 누가 나서서 그 싹을 자르고 뿌리를 뽑을 것인가?

편협하지 않고 겸손하여 어떤 상대도 포용할 수 있는 지도자, 지혜롭고 과감한 지도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 개개인이 분열과 대립이 아니고 양보와 타협할 줄 아는 성숙한 민주주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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