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목련꽃 그늘 아래서

2004-04-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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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4월이면 늘 시인 박목월 선생이 작사하고, 작곡가 김순애씨가 곡을 부친 ‘4월의 노래’가 생각난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
만 우리에게는 이 노래가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생생히 살아있다.

타임머신을 마치 돌려놓은 것처럼 4월이면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젊음이 되살아나게 하는 노래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이 시를 읽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도 항상 내 인생이 이 시처럼 아름답게 장식되기를 갈구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쁘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우울하고 어두운 것들이 많지 않았나 싶다. 인생이란 자체가 어쩔 수 없는 고해의 연속이고 보니 누구에게나 고통과 고난은 따르게 마련이다.

누군들 좋은 환경에서 아름다운 편지를 쓰며 살기를 갈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슬프고 고독하고 험난한 것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을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T.S 엘리옷은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엘리옷은 장문의 이 시를 통해 인간의 정신적 메마름,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결여된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면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했다.

실제로 4월은 통계적으로도 자살자의 빈도가 연중 가장 높은 달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4월에는 특히 그 빈도가 더 심하다고 하니 죽음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인가 보다.

그러나 엘리옷의 말처럼 겨울 뒤에 봄비, 죽음 후에 소생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험난한 세파 끝에 다시금 피어오르는 희망을 기다림도 바로 이 잔인한 달 4월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4월은 목련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장애인의 아픔이 담긴 달이기도 하다. 때문에 목련이 피고 지는 4월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으로 순종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불투명했던 인류에게 피안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분명한 핵심을 주었다. 4월은 이처럼 죽음과 부활, 지옥과 천당의 양대 극적인
영적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에게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절망과 희망의 세계를 모두 열어놓고 있다.

4월은 특별히 한국인에게는 잔인한 달이다. 독재정권에 대항하다 숨진 수많은 젊은이들의 혼이 담긴 역사적 사건, 4.19혁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흘린 피와 영령은 부패로 얼룩진 한국강토에 민주주의가 꽃피우는 대변혁을 가져왔다. 학생들은 비록 숨졌지만 그들의 혼은 살아 숨쉬면서 한국을 변화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한국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 잔인한 달 4월에 해결해야 할 국가적 중요한 이슈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헌재의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총선에 따른 국회의원 선거 결과이다.

이것이 해결되면 한국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한 단계 더 우뚝 설 수 있는 희망적인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잔인한 4월을 겪어내면서 한국은 이제까지 발전을 거듭해왔고 이번에도 또 4월을 보내면서 더욱 더 성장세를 보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미국도 금년 4월은 어느 해 보다도 잔인하게 느껴진다. 테러의 위험성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고 이라크주민들과 연합
군이 충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마무리작업도 갈수록 회의적이다.

올 4월은 유난히 잔인하리만큼 모든 업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날씨마저 눈왔다, 비왔다, 더웠다, 추웠다 고르지 못하다. 이 잔인한 달 4월에 어서 목련꽃이나 활짝 피어 우리의 마음을 밝고 환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베르테르의 편질 읽으며 향기로운 꿈을 마음껏 펼치던 젊은 시절의 목련꽃 그늘이 유달리 그리워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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