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물에 빠진 나르키소스

2004-04-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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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Narkissos)는 잘생긴 얼굴로 유명하다.나르시스라고도 하는 그는 물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레리오페의 아들로 태어나 절세의 미청년으로 성장했다. 한번 본 사람은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로 잘생겨 수많은 처녀와 님프들이 구애하였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님프인 에코도 거절당해 절망한 끝에 여위어 뼈와 가죽만 남아 ‘메아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열여섯살의 그는 어느날 숲속 깊이 들어가 우연히 샘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아름다움에 사랑에 빠지고만 그는 날마다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 물에 빠져 죽었다.그가 죽은 자리에서 황색과 백색의 꽃이 피어올랐는데 그것이 바로 요즘 봄 뜨락에서 볼 수 있는 수선화(水仙花)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살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자신과의 사랑에 빠진 그는 결국 죽고말아 현재 그의 이름은 자기애(自己愛, Narcissism)를 가리키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이나 뉴욕한인사회에나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잘 난 맛에 빠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탄핵’이란 단어를 겁없이 내놓은 ‘대통령 탄핵 소추’를 3월12일 국회가 가결한 이래 한반도 전체가 시끌시끌하며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주장, 저 주장을 사생결단하고 내세운다.

수많은 네티즌을 비롯, 국민들도 거리에 나서 촛불 시위로 의견을 내놓고 지지, 공격, 방어 등 편갈라 싸우다가 같은 편끼리 또 편이 갈라지는 등 모두가 독립투사로 이 한 몸 불살라 나라 위해 바치리 하며 투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치인들은 난폭한 언행과 폭행, 분열과 시기 질투 등 인간의 추악한 모든 면을 다 보여주고 있고,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민주당은 자신들만이 국난을 헤쳐나가 이 나라를 끌고 나갈 수 있다 한다.

그들이 민생의 현장을 찾는답시고 택시를 타고 시장을 찾아가고 상가를 방문하는 등 그야말로 구태의연한 정치 쇼를 벌이는데 새는 지붕의 물방울을 받쳐놓은 양동이까지 구색을 맞추고 있다.

한국 최고 집안의 ‘영양’(令孃)으로 성장했건 가난한 세탁소집 딸로 자랐건 그들은 돈이 없어 굶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며 시장통에 쭈그리고 앉아 진간장으로만 비벼먹는 잡채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신은 청렴결백한가, 왜 내가 해야만 하는가, 남이 하면 안되는
가, 이러한 반성, 관용의 정신이 없다. 통제력을 지니고 혼돈의 세상을 바로 끌어가야 할 식자층도 그렇다. 대학교수나 언론인, 심지어 공무원 노조, 전교조까지 스스로 특정정당을 지지, 서로의 입장만 주장하고 있다.

모두들 자기말을 들어달라고 아우성인데 참으로 그것이 박력이고 추진력일까. 아무도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는 말은 안하고 있다. 한치 양보나 이해 없이 저마다 나를 알아달라고 한다.

태평양 건너, 대서양 건너 미주지역 한인사회도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다. 뉴욕의 우리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져 다투어서는 안된다. 이는 나르키소스가 죽고 난 후의 공허한 메아리일뿐 어떤 실속도, 한인사회 화합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자신만이 잘났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 제가 판 무덤에 제 스스로 들어간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잘남에만 혹해 있다가 물에 빠져죽은 것을 기억하자.

4년간 일할 17대 국회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한국민이 열등국가 국민으로 전락하느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느냐가 달려있다. 나는 열등국가를 모국으로 두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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