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좁은 문

2004-04-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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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프린스턴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이 사십이 되던 해의 봄날 홈델에서 에디슨으로 운전하며 가는 차 안에서 문득 이유도 모르게 끊임없이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하였던 눈물의 세례를. 스스로 눈물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고국의 가곡을 들으며 혹 향수병인가고 진단도 해 보았다.

학창시절 음치협회(?) 회원으로서 스스로 실존적 노래라 칭하며 유일하게 즐겨 불렀던 최백호의 ‘보고싶은 얼굴’을 실로 오랜만에 혼자 부르는 동안 고독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보며 허무감이나 무상감 같은 좀더 근본적인 뿌리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자가진단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 후부터 내 안에 있는 눈물의 수분은 어떤 계기만 만나면 24시간 어느 때고 열려져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기 탐사는 계속되어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웠던 예레미아 마저 떠올리며 자기 위안이라도 삼는듯 나에게도 혹 그런 종류의 은사가 있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기까지 하였다.

올해 봄에도 이 눈물병은 여지없이 도졌다. 마치 나의 정신과 혼이 잔뜩 물먹은 솜처럼 언제고 조금만 압력을 가해도 주르르룩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외부 생활의 장애마저 느껴지게 되었다.

봄의 문턱에서 사순절이 시작되고 있다. 밝고 따뜻한 계절로 전이되는 변화와 열림, 고양되는 무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절제와 명상과 덕행을 요구하는 이 기간은 묘한 아이러니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우리의 성정은 발목이 붙들린 듯 때로는 억지 춘향식의 부자연스런 느낌도 되어보지만 아침나절을 금식하면서 잠잠히 보내곤 하던 기간 동안 어느 오후 서재에서 나도 모르게 30여년 전 읽었던 빛바랜 서적을 더듬어 찾았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여주인공 알릿사와 금욕적인 헌신과 자기회생의 순결한 정신적 고행이 기억났기 때문일까,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리움과 설레임도 묻어났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겁내는 두 젊은이와 현실의 안일을 거부하고 인생의 쉬운 행복을 부정하는 완전한 종교적 순수성을 탐구함으로써 제로움의 사랑을 거절할 구실을 찾는 알릿사. 결국 자신을 구속하고 자기희생으로 욕망을 극복하려던 나머지 일체를 상실하게 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세속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조차 너무도 간단히 사랑의 의미와 적용이 왜곡되고 너무도 공공연히 사랑이란 가치가 일회용으로 거래되는 경조부박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 그리고 신앙을 추구하는 진지함과 성실함의 자세를 일깨우는 힘이 크다.

마지막 부분에 일기 형식으로 씌여진 알릿사의 기도문이 의미심장한 여운을 준다. “주여! 제로움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신에게로 가까이 가는 길이란 결국은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신의 아들이 일찌기 홀로 걸었던 정녕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생명의 길이었다. 기도컨대 나의 마음과 영혼 안에 그리고 눈물 안에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주님의 수난에서 아직 남아있는 고통을 살아있는 날 동안 나의 속에서 계속하여 능히 감당하게 하
옵소서! 그럼으로 부활의 참기쁨에 온전히 참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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