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이 내리는데

2004-03-3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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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뉴욕신광교회)

머지않은 봄의 문턱에서 하얀 눈이 연일 내린다. 까만 세상을 희게 채색하기 위해 긴 겨울 그리도 많이 퍼붓더니. 끝내 채색하지 못한 아쉬움은 봄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함박꽃 되어 하얗게 피어 날린다. 창밖 외등 밑에 흩어지는 커다란 눈덩이에서 나의 유년이 아른거린다.

전신주의 희미한 외등 아래 함박눈이 날리고 좁은 골목에는 메밀묵과 찹쌀떡을 외치는 정겨운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며 겨울밤은 깊어만 갔다.겨우 한 개씩 밖에 돌아가지 못한 찹쌀떡을 아껴 먹으며 어머니께 듣던 옛날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주로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했던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착하게 살아가라고 딸 넷의 이름 가운데 돌림자를 착할 선(善)자로 지으신 부모님의 바람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나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정직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었다. 볏단을 서로의 낟가리에 밤새 옮기던 형제의 이야기에서 베품이 있는 사랑을 배웠다.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아주 가끔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나의 어머니를 답습하고 있다. 또한 부모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왔나를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요즈음 한인사회 속에서 인기가 대단한 TV 드라마가 있다. 제목이 ‘대장금’이란 연속극이다. 나와 남편 또한 이 연속극의 열렬한 시청자이기도 하다.연속극이 비디오 가게에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퇴근길 저녁꺼리를 위한 샤핑백에 함께 묻어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 일과로 시달린 남편에게 저녁식사 후 들여미는 군것질거리와 이 비디오 테입은 나를 만점짜리 아내로 만들기도 한다. 이 사극 내용 또한 정의와 불의의 다툼이다. 코너로 몰리는 주인공에게 시청자들은 동정을 보내며 안타까워 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시청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산뜻한 상황으로 역전되는 정의의 승리는 가슴 졸이던 시청자들에게 후련한 통쾌감을 안겨 준다.

이러한 사건들이 한 마당 두 마당 계속되며 드라마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극중에 자신의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서 상대방의 목숨까지도 서슴지 않고 해치는 권모술수에 능한 한 여인이 등장한다.

연속극이 거의 끝으로 마감되어 가며 과거의 죄상이 드러난 이 여인에게 다가온 불운으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며 동정의 여지 없이 사악했던 여인의 생은 마감되어진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 금전 속에 마비되어버린 가치관, 전문적인 연출가에 의해 각색된 드라마지만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우리의 현대사회를 재조명 시켜 주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 주머니가 동이나 버려 들었던 이야기 또 다시 들어도 재미있기만 했던 그 얘기들 속에서 선한 양심을 배웠고, 세상 속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 이전에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한 삶의 진리를 세워주셨다.

그 고귀한 형상대로 부여하신 심장 위에 거짓말 탐지기까지 들이대야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뚜껑이 닫혀지지 않도록 채우고 또 채워도 자꾸 허기만 지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욕심 주머니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도 무엇을 위한 동분서주였을까? 가지신 모든 것,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나를 위해 값없이 내어주신 그 사랑 앞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숨어버린 하와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연일 내려도 희어지지 않는 세상 속에 뛰어드는 백설의 난무가 흐려지는 시야 속을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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