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욕망, 그 끝은 어디인가

2004-03-29 (월)
크게 작게
최성규(전 ‘코이노니아’ 편집인)

최근 며칠간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기업가인 마사 스튜어트에 대한 재판으로 떠들썩하였다. 그녀에 대한 죄명 4개항에 대하여 배심은 모두 유죄 평결을 한 것이다. 6월 17일에 있을 선고재판에서는 최고 20년까지도 선고받을 수 있지만 전문가들은 대략 1년여 정도 선고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자산 10억달러가 넘는 그녀가 이와같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주식거래로 얻은 부당이득 23만달러 때문이다. 이 부당 이득은 사건을 은폐하고 거짓 진술하게 만들어 성공한 여성기업가 중의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끈 것이다.


억대의 자산가가, 그것도 이제 62세인 그녀가 단지 23만달러 때문에 차가운 철창 안에서 지내야 하고 그녀 이름을 따서 지었던 회사 베스트셀러 월간지 등에서 그녀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인간 욕망의 끝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잘 살아보자고 출발했던 공산주의는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사라지고 문제가 많은 자본주의는 더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이 도전하게 만들어 역사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지만 이것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당사자를 파멸로 이끄는 것 또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아왔다. 후세인의 욕망이 그랬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게 만든 사람들의 욕망이 그랬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지나친 욕망을 철저히 경계한다. 성서에서도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지나친 욕심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적당히 조절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묘한 양면성까지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은 평생 인도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가난하게 살아온 테레사 수녀지만 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빌 게이츠이다. 평생 자기 재산을 가지지 아니한 한경직 목사를 존경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랫동안 지리산 산자락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혼자 살며 무소유의 기쁨을 얘기하는 법정의
글은 많이 읽으면서도 막상 자기 자식은 사회에 유익을 주는 직업을 가지기 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갖고 부를 이루면서 살기를 원한다.

이런 우리의 양면성이 슬기롭게 조화를 이루게 하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그것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어느 선에서 자제하고 그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운동을 아주 좋아할 수 있고 또 음악을 좋아할 수도 있다. 숲이 우거진 알리폰드 팍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숲이 속삭이는 오랜 역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한권의 시집이나 좋아하는 책을 들고 잠시 여행을 떠나 낯선 곳의 낯설음을 즐기며 현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신은 물질 외에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우리 곁에 허락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하여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다면 과욕 때문에 일어나는 추악한 일들은 좀 더 적어지고 삶은 더 풍요로와질 수 있을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