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난’ 아닌 ‘사랑’

2004-03-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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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롱아일랜드)

우린 종종 잘못 번역된 소설이나 시, 영화제목, 간판 등을 보면서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뭔가 아쉬운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멜 깁슨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누군가가 ‘예수의 수난’이라고 번역을 했고 그 이후엔 신문, 방송등이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좀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멜 깁슨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꼬집어 ‘Passion’의 뜻을 물어봤는데 ‘Obsessive Love’라고 답변했다. 지극한 사랑, 열정, 그런 의미인 것이다.영화의 내용이 고문과 고난, 수난이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수난이 초점이 아니고 그 수난을 감수한 사랑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리라 생각된다.

멜 깁슨은 스스로를 가장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부인의 신앙과 믿음의 영향을 받아서 지난 12년 동안 이 영화를 머리속에 구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비록 성경에 가장 충실하려고 애를 썼고 로마교황도 관람한 후 ‘It is what it was’, 성경 그대로였다고 평했다고 하지만 영화의 성공과는 달리 영화제작사들의 대부분의 큰 손은 유대계이기 때문에 이 영화로 인해 제작사들이 멜 깁슨의 참여를 거부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이미 많이 나와있기에 좀 다른 각도에서 느낀 점을 말하려고 한다. 몇년 전, 자식 하나를 잃고 또 1년여전엔 다른 아이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은 극심한 고통을 보면서 느낀 아픔들이 독생자를 버리시는 하느님의 아픔과 사랑을 부분적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빌라도였다면! 하고 스스로 물어보면서 인간의 연약한 틀을 깰 수 없었을 거
라는 생각에 연민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 두 사람 다 인간적인 잘못을 저질렀고, 둘 다 잘못을 뉘우쳤다. 유다는 은 30량을 갖고 가서 돌려줬지만 받지 않아서 내버리고 머리를 끌어잡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뉘우치기는 했지만 돌아서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 놀라 통곡하며 돌아서서 순교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어쩌면 나도 유다처럼 많은 잘못을 범하고 뉘우치기는 하지만 돌아서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처음엔 불평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고 가는 동안 마음의 변화와 감동을 받아 그 후에 초대 교회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신앙생활이 힘겹고 무거울 때, 그래서 벗고 싶고, 비껴 가고픈 유혹이 있을 때라도 참고 가다 보면 시몬처럼 기쁨으로 갈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끝으로 끝까지 따라간 제자 요한과 두 마리아의 한결같은 신뢰와 믿음과 용기를 보면서 달면 마시고 쓰면 뱉고, 잘 나갈 땐 함께 가고 힘겨웁고 어려우면 손 빼고 떠나가는 약삭빠른 철새와 같은 내가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해 봤다.

사순절이 다 가기 전,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한 번쯤 관람하고 스스로의 위치와 믿음을 점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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