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눈(春雪)

2004-03-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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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우(소설가)

춘삼월인데도 공원은 마치 한겨울처럼 흰 눈으로 덮여 있다. 나무 가지들도 눈꽃 덕인지 그 모습이 한층 정겹다. 며칠 전까지도 색깔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나무며 잔디들을 보았는데 계절에 거슬려 내리는 눈이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곧 녹아 없어질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맴도는 봄 눈은...

봄눈은 아마도 사랑인가 보다. 중병을 앓고 난 환자처럼 초췌해진 언덕을 보고 울먹이고, 나뭇잎 한 개 없는 가지에다 저리 얼굴을 부비는 것을 보면. 그러면서도 바보같이 암말도 하지 못하고 소리 없이 감정만 분출하고 있다. 한여름의 소나기였다면 큰 소리로 벼락과 함께 호통을 칠텐데… 저렇게 절제하다 생병이 나서 존재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까?


봄눈은 철이 없나 보다. 호수의 모퉁이에서 물보라에 파묻혀 차마 고 작은 차돌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래봐야 파도가 긴 혀로 낼름 삼켜버리면 존재도 없이 사라질텐데… 단단한 차돌의 마음이 열려 바보를 받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겐가?

그래도 봄눈은 사랑인가 보다. 쬐그만 햇살에 세상 분간을 못하고 땅 위로 솟구친 작은 새싹에게 어서 피하라고 속삭이는 것을 보면, 겨울바람에 쫓기면서도 오소소 몰고 간 바람의 입김으로 땅속에 숨어있는 생명의 전령들에게 아직은 나오지 말라 귀띔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동반한 칼바람이 가녀린 싹의 생명도 훔친다는 것을 봄눈만 모르고 있다.

봄눈(春雪)이라…
지금 한국도 봄눈이 한창이다. 흰눈에 덮여 가장 큰 권한이 일시 정지 상태다.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 풀리겠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흙탕물 없이 말갛게 녹아내리기를 원한다.민주사회에서 정치 참여는 국민이 가져야 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권리든 의무이든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는 반드시 의사 결정을 한다. 의사 결정은 개인이나 종합적인 판단에 따르기 마련이고 그 판단에 이르기까지 분석은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감정과 기분대로 의사 결정을 하고 정치를 한다면 정치의 핵심인 국리민복(國利民福)은 멀어질 뿐이다.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나라의 발전과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앞세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이나 가족, 가신(家臣)들에게 엄청난 부(富)와 권력을 부당하게 안겨줬다는 것을 민초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은 역사를 잘 들먹거린다.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든지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등으로 자기 혼자 역사의 한 획을 긋는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역사는 도도한 물결이다. 지금 이 행적 조차 봄바람으로 흔적도 없이 밀어부치고 민족의 발전을 위해 흘러가리라 믿는다. 그 이유는 봄눈으로 인해 한 번 더 다져진 땅에서 피어난 생명력으로 민주주의가 꽃피고 살림이 윤택해진다면 한번쯤의 봄눈을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또한 국민들은 무지몽매(無知夢寐)가 미덕으로 간주되었던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과 의식이 너무 밝아 투명하기까지 한 신주류의 행동력 있는 권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아직은 봄바람이라 부르기 어려운 매운 바람이다. 그래도 불원간 저 공원의 봄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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