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잠 안자고 뭐해?

2004-03-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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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며칠 전, LA쪽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전 직장 동료의 기사를 읽었다.
결혼 전 성이 아닌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내가 알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와는 사회생활 첫발을 디딘 해, 함께 취재하고 기사 쓰고 야간 작업을 했고 직장 앞 찻집에서 수없이 많은 커피를 마시며 동료애를 나누었다. 그는 통통 튀는 기사를 아주 잘 써 잡지사를 거쳐 방송국 구성작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결혼 후 LA에 정착했다.


오랜 시간 전업주부로 살다가 그림을 배운 지 10년만에 첫 개인전을 갖는다고 한다. ‘돌아버리실 것 같았던 가사 스트레스’를 없앨 수 있었던 것은 그림 덕분으로 엄마, 아내 자리서 찾은 중년의 자신이 미워 보이지 않아 좋단다.

하고 싶었던 것,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며 그는 지금 한번 시도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많은 한인 여성들이 가사와 일 스트레스 속에 살며 원래 자신이 되고싶었던 것, 자기가 하고자했던 일을 잊어버린 채 살고있다.

누군들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고싶지 않으랴. 그러나 성악공부를 하고 디자이너가 되고싶고 글을 쓰고싶고 등등 많은 일들이 제일먼저 시간과 돈이 주어져야 가능하다. 당장 렌트와 전기세를 걱정해야 하는데 한가롭게 붓을 잡고 노래를 부를 여유가 없다.

미국에 살면서 남자 혼자 벌어도 생계가 유지된다면 여성들은 누구나 자신이 어려서 꿈꾸던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그러나 현실은 한때 한껏 부풀린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 위에서 청아한 아리아를 불러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고싶던 이가 지금 하루종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음식을 날라야 하는 종업원이 되어있기도 한다.

학창시절 귀신처럼 피아노를 잘 쳐서 특차로 일류 음대 피아노과를 나와 유학왔지만 전공과는 엉뚱하게 네일 업소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허나 우리들은 이 와중에도 50대 중반 간호사가 화가의 꿈을 이루어 맨하탄에서 개인전을 갖거나 일 끝난 밤에 집 인근의 학교를 야간에 다니며 공부한 끝에 유능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거나 성악가가 되어 노인회관 건립 기금모금 자선 음악회를 갖는 기사들을 종종 접한다.

또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한 여성에게 그 비결을 물었더니 “처음 미국인과 만난 날 도대체 벅벅거리기만 할 뿐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해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자지 않고 영어 공부를 했다. 깨어있는 동안 내내 영어문장만 생각했다”고 했다.

어느 유명 전문직 여성은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 없어요. 버릇이 되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상은 못 자요. 그러니 남들 자는 동안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죠.”그렇다.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귀가해 저녁 차려먹고 설겆이 하고 씻고 나면 밤 11시, 요즘 재미있는 한국 TV 드라마 비디오는 좀 많은가, 스트레스 해소차 한편 때우고 나면 밤 12시나 새벽 1시, 다음날 일을 하자면 잠을 자야한다. 또 아무리 책을 붙들고 오늘밤만은 좀 읽고 자자고 다부진 결심을 하지만 폭포수처럼 몰아치는 잠 속에서 한 장을 잡고 씨름하다가자고 마는 일이 반복된다면 그냥 더 이상 헛꿈 꾸지 말고 지금 그 상태로 살다가야 한다.


다만 시퍼런 배추처럼 싱싱하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일을 척척 해내고 있는 여성들을 보면 그들은 남들 잘 때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노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밤에 무얼 하려하면 남편이 소리지르죠. 잠 안자고 뭐해? 때로 자는 척 하며 자리에 누웠다가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일어나 공부 하러갔죠. 불을 켜면 식구들이 깨니까 화장실을 이용했답니다.’

우리 이 말을 소홀히 듣지 말자. 정말 가정살림에 보탤 돈도 벌어야 하고‘나를 찾는 무언가’도 하고싶다면 ‘잠 안자고 뭐해?’하는 이 말에서 해방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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