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켜야 할 예의

2004-03-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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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녀(수필가)

나라마다 국가의 크고 작음에 상관 없이 국가(國歌)가 있고 국기(國旗)가 있다. 그리고 공휴일이나 큰 일이 있을 때는 국기를 내 걸음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예의를 표시한다.국기는 나라를 상징하고, 국가에 대한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힘 있는 도구라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미국 시민인 내가 국기를 걸어본 적이 없고, 국가를 부를 기회도 없이 살아왔다. 태극기도 성조기도 걸어보지 않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은 지가 몇 십년이 된 것 같고, 미국 국가도 제대로 부를 줄을 몰라 우물우물 부르는 시늉만 해 왔다.


어찌 보면 내가 속한 뚜렷한 나라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국기를 잊어버리고 살아온 내가 분명 국제 고아이었던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서글퍼지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어 얼마 전부터는 국기를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내가 미국에 사는 한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똑같이 대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예의 바른 동방의 나라 한국에서 온 내가 비록 국기를 거는 일이 의무는 아닐지라도 국기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겠다는 생각이 늦게나마 느껴졌으니 다행이다.

3월 1일을 기해 오랫동안 별러왔던 국기 게양대가 드디어 우리 집 마당에 서고, 성조기와 태극기가 걸리게 되었다. 태극기가 크다고 말했더니 어느 정도인지 가늠을 못한 남편이 태극기 보다 두 배나 큰 성조기를 사왔다.

우리집 높이 보다 더 키가 큰 게양대가 꼭대기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새,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이고 마당 가운데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집에 비해 너무 높아서 어색한 감은 있으나 국기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걸려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 진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풍금에 맞추어 목청껏 불렀던 태극기 노래가 내 귀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다. 높이 걸린 태극기를 보니 몇 가지 장면들이 스쳐 3.1절의 유관순양, 8.15 해방을 맞아 길을 메웠던 군중, 지난 여름 있었던 세계축구대회 때 ‘대~한민국 대~한민국’ 함성과 함께 일었던 태극기의 물결이 떠오른다.

성조기도 여러 장면들을 불러 온다. 달에 첫 발을 디딘 우주인들이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던 장면, 한국 6.25전 당시 북진을 해가면서 어려운 고지를 탈환하고 미군 병사들이 국기를 꽂던 사진으로 본 장면들, 전쟁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고 돌아오는 젊은이들의 관 위에 덮여진 성조기, 어린 존 케네디 주니어가 장례식에서 성조기를 향해 경례를 하던 모습, 9.11 사
태가 일어났을 때 집집마다 노랑 리본들과 함께 매일 이웃들의 집에 성조기가 걸렸던 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성조기 핀을 달고 다니던 모습들이 짤막짤막하게 눈 앞을 스쳐간다.

저녁이 되어 국기들을 내려 모퉁이를 맞춰가며 얌전하게 접는 것도 무언가 엄숙한 기분이고... 오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의식에 대한 진지함 같은 것도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집 태극기는 35년 전 내가 미국으로 이민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서랍 속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가 드디어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참 기쁘다. 손자 손녀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유엔빌딩 앞에 쭉 열지어 있는 많은 국기들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야기 해 주고, 세계 모든 국가들이 서로 다 함께 잘 사는 지구상의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된다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는 일은 한국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일이 앞으로는 없었으면 한다. 내가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바라는 것만은 아니다. 국기를 모욕하는 일은 국가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인접해 있는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북한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는 미국이고 보면 우리가 그렇게 과거의 어떤 잘못들을 들쳐가면서 감정을 건드리는 것 보다는 이성적인 방법으로의 해결책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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