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빌려쓰는 목록’

2026-04-28 (화) 12:00:00 전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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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빌려 쓰고 있는 목록입니다
시간, 바람, 햇빛, 달, 별, 물, 나무, 풀......
사는 동안 일일이 셀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공책에 적어놓겠습니다
오늘 난 너무나도
한나절 펼쳐놓은 봄 햇살 속에
볼에 스치는 솔바람과
홀아비꽃대 꽃향기와
내가 막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
“안녕하세요”
유치원 아이들이 건네는
인사도 받았습니다
내일 가도
그 자리에 있을
숲속 길

‘빌려쓰는 목록’ - 전현자

시인의 공책을 본 세상이 잠깐 빛나는 듯도 합니다. 목록에 오른 이름들이 미소를 머금지만 더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빌려 쓴다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느리게 가던 시간은 얼마나 빠르게 태엽을 감아놓았나요. 청정한 바람은 얼마나 회색이 되었나요. 햇빛은 얼마나 대기권 온실에 꽁꽁 가두어두었나요. 달에도 가택 수색하듯 발자국을 찍고 있지요. 별은 이제 꿈이란 상징을 잃었지요. 물은 자꾸만 둥둥둥 바다로 실어나르지요. 나무와 풀들은 점점 도감을 바꿔 앉지요. 유치원 아이들의 귀한 인사를 받았군요‘안녕하세요?’ [시인 반칠환]

<전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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