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독립선언 주역임에도 친일 논란으로 홀대
▶ VA 거주 차남 백순 박사 “바른 평가 이뤄지길”

20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8독립선언 100주년 학술세미나’에 참가한 백순 박사가 기념관에 걸린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가운데 선친인 근촌 선생을 가르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의 주역임에도 친일 논란으로 홀대당한 근촌(芹村) 백관수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한국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근촌은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거주 중인 백순 박사(전 연방노동부 선임 경제학자)의 선친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서훈을 받지 못하고 역사의 그늘에 머물러 있다.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역사학자)와 류희춘 씨 등은 근촌의 서훈을 위해 신문기고 또는 국가보훈부에 ‘백관수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공적 재심사’를 요청하며 적극 나서고 있다.
백 교수는 지난 1일 한 일간지 기고문에서 “역사학자의 양심을 걸고 근촌의 업적을 기리며 그를 둘러싼 오해를 사실에 기반해 소명하고자 한다. 이제는 근촌의 삶을 온전하게 재평가해 국가 보훈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시점”이라 천명했다.
류씨는 지난달 18일 국가보훈처에 민원을 제기해 최근 “면밀한 검토와 자료 조사를 거쳐 백관수 선생을 2026년 광복절을 계기로 공적 재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며, 심사결과는 8월경 공문으로 회신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근촌은 1919년 일본 도쿄 유학 중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선구적 인물이다. 이 거사는 훗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했다.
백 교수는 일제 말기 친일 성향의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이력과 임전보국단 명단 등재를 두고 제기되는 친일 의혹에 대해 “당시 언론 환경의 특수성을 깊이 있게 고려해야 한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민족 언론을 말살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며 기관지의 친일화를 획책했다. 근촌이 사장직을 수락한 것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부역이 아니라 민족 기관지의 명맥을 잇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하다. 비록 임전보국단 간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는 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일제의 압박 속에서 민족 언론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적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
또 “근촌은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의 자존심과 기개를 지킨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가 남긴 한시들에는 망국의 한과 변치 않는 절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의 굳건한 내면세계를 짐작하게 한다”고 평가한 후 “국가 보훈처는 이제 지체없이 근촌 백관수 선생에게 독립 유공자 서훈을 추서해 역사의 정의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근촌의 차남인 백순 박사는 2019년 한시집 ‘동유록, 근촌 백관수의 대춘보-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펴냈다. 동유록은 근촌이 2.8독립선언 후 동경 감옥에 1년간 투옥 때 지은 한시 71편을 모아 엮은 것이다.
백 박사는 “1939년 아버지의 ‘쉰둥이’(아버지 나이 50세)로 태어나 1950년 6.25동란 때 납북으로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 내 나이 8세이던 1947년 어느 날 저녁 밥상을 물린 후 10살 위 형님과 내게 동아일보 폐간 당시 조선총독부의 자진 폐간에 항거하면서 충절을 지켰다고 훈계하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아버지에 대한 바른 평가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근촌 백관수(1889~1961)
전북 고창 출신으로 3ㆍ1운동의 도화선인 2·8동경유학생 독립운동의 주역이다. 2·8독립선언 직후 체포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 후 동아일보 사장으로 폐간 날인 거부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과 손잡고 한민당 창당, 제헌국회 초대 법사위원장으로 헌법기초를 하는 등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돼 61년에 사망해 평양 신미리 묘역에 안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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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