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어떤 인생 - 미란다

2026-03-31 (화) 08:47:08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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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미란다 고지(Miranda warning)’가 법으로 정해진 건 미란다라는 납치, 무장 강도, 강간 사건의 피의자 때문이었다.

어린 미란다 (Ernesto Miranda, 1941-1976)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초등학교 때부터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첫 강도 사건에서 1년을 선고받고 교화학교에 수감되지만, 나오자 마자 다시 범죄를 저질러 또다시 같은 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화려한 범죄 경력은 이로부터 멈출 줄을 모른다. 그는 온 남부의 주들을 휘젓고 다니며 범법을 일삼고, 수없이 감옥에 들락거린다. 감옥을 나와도 갈 곳이 없고 직업도 없는 그다. 스무 살 즈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10년 연상의 여자와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여자는 돈이 없어 이혼도 못하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을 키우고 있었다.


1963년 그는 18세의 소녀를 납치 강간하고는 그녀가 몰던 트럭을 타고 도주한다. 하지만 트럭이 발견되는 바람에 검거돼 라인업에 서게 된다. 아직 구속영장이 없던 경찰은 은근히 그가 범인임이 다 밝혀졌다고 암시하며 자백을 유도한다.

그는 ‘이 자백은 강제가 아니고 자발적이며, 나는 법적 권리를 모두 알고 있고, 이 자술서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음을 안다’는 문구가 인쇄된 종이에 자필로 죄를 낱낱이 적는다. 아마도 헤딩은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라인업에 서서 저 소녀가 바로 범죄의 피해자였음을 자진해서 밝힌다. 그는 침묵의 권리도 변호사를 선임 받을 권리도 잘 모른다.

뒤늦게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자백에 의해 이루어진 선고에 대해 항의했으나 기각되고, 미란다는 20-30년 형을 선고받는다. 변호사는 항소했지만, 지진부진 세월만 가다가 그는 자신의 건강 문제로 더 이상 변호를 할 수 없게 된다. 이어 다른 변호사들이 프로 보노 케이스로 사건을 맡는다.

새 변호인들은 피의자의 침묵과 법적 도움의 권리가 침해됐다며 이번엔 연방법원에 사건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한다. 더 이상 피해자와 피의자의 다툼이 아니라, 피의자와 주정부 간의 다툼이 된 것이다.

미란다의 변호사는 교육 수준이 낮고 불안정한 범죄자들이 헌법을 다 알아 스스로를 방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변호한다. 반면에 검사는 모든 사건의 피의자들에게 변호사를 선임해 줄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판결은 1966년에 미란다의 승리로 끝나고, 이때부터 경찰들에게는 읽기 좋은 미란다 카드가 배부된다.

전에 받았던 형량은 버려지고, 미란다는 텍사스 주에서 다시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동거녀가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바람에 그는 다시 20-30 년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그러다 1972년 사면되어 나온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자신의 사인이 들어간 미란다 카드를 1불 50센트에 팔고 다녔지만, 사업이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는 이후에도 이런저런 잡범으로 여전히 감옥을 들락거린다.

1976년. 피닉스에 있는 한 술집에서 그는 싸움에 휘말리고, 칼에 맞아 죽는다. 그의 나이 서른 넷. 그를 죽인 범인은 멕시코로 도망가 끝까지 잡히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유명해진 그는 자신의 사건으로 법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죽기까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애를 써서 법을 바꾼 건 그가 아니라 그의 변호사들. 무료 법률 서비스로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려 했던 저 변호사들보다 미란다가 더 유명세를 타는 건 인생의 아이러니다.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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