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 날아온 벚꽃 사진 한 장에 비로소 봄을 실감했다. 지루했던 겨울의 끝에서 마주한 분홍빛 꽃잎은 계절의 정직한 변화를 알린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마주한 세계의 풍경은 여전히 시리고 참혹하다. 중동과 동유럽에서 들려오는 포성은 멈출 줄 모르고, 현대 문명이 쌓아 올린 경제의 톱니바퀴는 삐걱거리며 서민들의 삶을 짓누른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인류는 과거 그 어떤 성군이 다스리던 황금기보다 진보했음에도, 왜 여전히 서로를 죽이고 파괴하는 '살육의 전과'를 훈장처럼 자랑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왕족만이 누리던 의학적 혜택을 누리고, 인공지능이 지식을 실시간으로 실어 나르는 빛의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분이 아닌 법 앞의 평등을 말하며 자유를 구가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기술적 진보 뒤편에는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현대 교육은 오로지 생존과 경쟁을 위한 '도구적 지식'에만 매몰되어 있다. 인간 내면의 단단함을 기르는 수신(修身)의 가치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고,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된 자리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공동체 의식의 해체가 채웠다.
'나'는 풍요로워졌을지 모르나 '우리'는 빈곤해졌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나 고독하고, 지식은 넘쳐나되 지혜는 고갈된 상태, 이것이 현대인의 적나라한 초상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침략을 자행하고 파괴를 일삼는 이른바 '괴물'들이 설쳐도, 현대의 언론과 국가, 지도자들은 인류애적 정의보다 득실의 계산기에 매달린다. 철학 없는 교육이 인류를 맹수보다 더 폭력적인 존재로 길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운 적이 없다. 좋은 성적과 간판을 위해 지식을 암기하며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부부의 관계, 부모의 역할, 타인과의 유대를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각자도생하며 본능적으로 익혔다. 기초 공사 없는 부실공사처럼, 우리의 관계와 윤리는 늘 불안정하다.
반면, 500년이라는 유례없는 긴 세월 동안 왕조를 유지했던 조선의 힘은 바로 교육에 있었다. 그 핵심은 명료했다. 먼저 사람이 되고, 그 후에 지식을 쌓으며, 마지막으로 그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는 단계적 흐름이었다.
유년기(소학)에는 지식보다 먼저 기초 예절과 사람의 도리, 즉 '습관'을 가르쳤다.
청소년기(사서삼경)에는 개인의 수양을 넘어 세상을 다스리는 철학적 논리를 연마했고, 성인기(지행합일)에는 배운 바를 일상의 도덕적 실천으로 구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세종의 황금기와 정조의 르네상스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람됨'을 근간으로 삼은 교육이 국가의 기틀을 지탱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한 시대에 살면서도, 그 과학적 성취를 폭력에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과학적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철학 없는 지식은 인간의 손에 쥐여준 날카로운 비수와 같다. 그 칼날은 결국 타인을 향하고, 종국에는 우리 자신을 찌른다.
따뜻한 봄이 와야 꽃이 핀다. 우리 마음속에 인간다움의 철학이 피어나야 진정한 인류의 꽃이 핀다. 이제라도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의 양을 늘릴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깊이를 더할 것인가. 교육의 방향을 '도구'에서 '사람'으로 되돌리지 않는 한, 인류의 진보는 그저 파멸로 가는 속도를 높이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벚꽃이 피는 봄처럼, 우리 마음에도 따뜻한 변화가 필요하다. 비록 미국 사회에서 소수 중의 소수이지만 한인 커뮤니티 차원에서 먼저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 교육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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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