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 인간이다’라는 글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그 문장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인생은 본래 외로운 것이라는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박목월, 김소월, 윤동주, 정호승 같은 시인들의 시나 수많은 노래 가사에서도 이러한 외로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혜민 스님의 책에서도 “부모의 죽음으로 우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외로움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었죠.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이 깊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이는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또 어떤 이는 미국에서 “외로워서 교회에 간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낯선 곳을 처음 찾아가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누구도 당당히 나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종교를 갖고, 신을 찾으며 외로움을 이겨내려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구걸하듯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저는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을 기꺼이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깊고 단단해집니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대신 없애줄 수 없는 감정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홀로 남게 되고, 혼자의 시간을 잘 견디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들어간다면,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조차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늘 사람들과 어울리고 통화하는 이일수록,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에 더 큰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곁에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인연 속에서, 결국 홀로 남게 되는 그 시간 -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인생의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남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고요한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외로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외로워서 모임에 나가지만, 그 모든 이유의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지,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 혹은 나를 부르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그 길의 끝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따르든, 혹은 따르지 않든, 선하게 살아가며 남을 배려하고 사랑으로 채워진 삶을 산다면 우리 모두의 길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훌륭하게 살다 간 이들의 삶을 존경하고 따른다면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내리는 사랑의 빛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온전히 비춰집니다. 위대한 선구자들의 가르침과 기적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특정한 장소에서만 일어난다고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기적이 이미 내 삶 속에서 다른 형태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산다면,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