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말씀대로 우리는 여행 중에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 조용히 앉아 계시던 수녀님을 본 순간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커피 한 잔 하시죠?” 하자 수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함께 자리를 하셨다. 그분은 내게 아무도 모르게 다가온 벗이자, 보이지 않는 나의 수호천사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분 앞에 서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작고 단아한 모습 위로 수도복이 주는 엄숙함 때문일까. 그 옷은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는 수도자의 결심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가끔씩 수녀님을 찾아뵙고 영성에 대한 지도를 받거나, 삶의 어려움을 나누곤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힘들 때면 먼저 전화를 주셨다.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그분께는 말없이 사람을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는 이상했다. 목소리가 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놀라 여쭈니 믿기 힘든 이야기가 돌아왔다. “밤에 도둑이 들었어요.” 도둑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수녀님 두 분을 무참히 폭행하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성대를 다쳐 목소리를 잃으셨고, 온몸에 타박상을 입으셨다. 며칠간 병원 치료를 받으신 후 주교님이 즉시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했다. 폭력의 대상이 된 수도자라니? 그것은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그러나 수녀님은 여전히 병원 사목을 하시며 병든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 아픔 속에서도 사랑과 희생의 현존으로 남아 계신 것이다.
그 후 어느 해 겨울, 친구의 초청으로 먼 곳 성당의 성탄 파티에 갔다. 화려한 조명, 흥겨운 음악, 가득한 음식들로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런데 홀 중앙에서 누군가가 라인댄스를 이끌고 있었다. 앞으로 한 발, 뒤로 한 발, 옆으로 이동하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그 사람? 수녀님이셨다.
순간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다. 그날의 수녀님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들 틈에 스며들어 하느님 앞에서 바람처럼 춤추시는 그분의 모습은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기도처럼 보였다. 자유와 헌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몸으로 드러내는 성스러운 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녀님은 마이크를 잡으시고 노래를 부르셨다. “세상에 누가 이토록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노래 부를 수 있을까.” 나의 외침은 소음 속에 묻혔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하늘에 닿았다.
파티가 끝난 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수녀님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생각했다. 삶의 여정은 누구에게나 다르지만, 결국 우리가 향하는 곳은 하나, 하느님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 수녀님의 얼굴에도 주름이 늘고, 신발도 낡았지만 그분의 마음은 여전히 현장의 일꾼으로 남아 있다. 주름진 두 손에는 수많은 기도와 시간이 스며있고, 미소 짓는 얼굴에는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자취가 담겨 있다.
그분의 삶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