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뉴욕에도 감시 카메라(surveillance camera)가 많이 생겨 어디든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하며 긴장된 세상에서 살아간다.
지인은 유토피아 파크웨이를 지나며 4번을 같은 시간대에 찍혔다고 투덜댔다. 요즘은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감시 카메라가 있고 롱아일랜드에도 점점 늘어가며 우리들 의식 속에 자리한다.
카메라의 용도는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생긴 것이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우리들 의식을 위협하고 통제한다. 길에도 집에도 일하는 곳에도 가는 곳마다 주변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불편해진다. 그 자체가 사람의 의식 속에 들어와 행동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죄를 짓는 범죄자들을 속속들이 찾아내는데 일등공신을 하니 곳곳마다 설치를 요하는 세상이 되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교도소의 형태를 한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파놉티콘(Panopticon= pan (모두) opticon(보다)) 은 원형 감옥이라 불려 밖은 건물이지만 안은 원형으로 되어 감옥에서 수많은 범죄자들을 위에서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최소의 인력으로 최대를 감시하며 압력을 가하는 일이라 효과적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참여한 자들을 위에서 지켜보고 감시하며 조종한다.
많은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시탑이 된 건 감옥의 원형 건물뿐만 아니다.
시민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미디어나 스마트폰을 통해 권력자들이나 공인의 얼굴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그들을 평가한다.
행동에도 통제를 받고 심판대에 오르고 평가를 받으니 소수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수가 소수를 감시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이를 시놉티콘(Synopticon)이라한다.
소수에게도 다수에게도 감시당하며 우리의 의식과 영혼을 갉아먹으니 정신적인 피로감이 늘어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힐 일이 없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뭐든 눈에 띄는 행동을 하거나 개성이 강하면 늘 타깃이 된다.
드러나도 감시당하는 불편한 현실과 단절하고 싶어 현대인들은 자꾸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현실을 도피하는 듯 보이지만 스트레스를 없애고 명상 속에서 심신을 위로받고 힐링을 하려 한다.
지금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AI가 영혼을 통제하며 세상을 지배한다면 편리함 뒤에 오는 삶은 무의미하고 기계에 의해 조종당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리들 주변을 더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해 줄 편리한 세상이 왔다.
많은 문명의 기기뿐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벗어나 가끔은 조용히 은둔하며 살고 싶다. 맑은 영혼과 의식을 통제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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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