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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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남산에서의 약속

2024-11-26 (화)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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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드라마의 위상을 실감한다. 7살 때 한국을 떠나온 딸애와 프랑스인 사위가 한국드라마에 빠져서다. 권유한 적도 없는 내게 넷플릭스를 열어주고 추천해서 보게 된 드라마가 [이태원 클라스]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주제부각은 선명히 와 닿았다. 소신 있는 리더의 포용성과 책임감, 신의로 밀착된 5명 팀원들의 신뢰감과 협조가 돋보였다. 슬며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인간관계를 성찰해보게끔.

불현듯, 한마음으로 통했던 친구 5명이 대비됐다. 고1때 만났지만 우린 3년 내내 점심시간이면 생활관과 강당 옆 좁은 공간, 스노우볼 나무 아래서 정담을 나누곤 했다. (당시엔 나무이름도 몰랐지만 화사한 하얀 꽃나무가 영화 [모정]의 나무 같다며 택했던 아지트였다.)


시험이 끝난 날은 무조건 충무로의 아테네란 학생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우린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모이자는 염원을 담아 AGAIN의 글자 하나씩을 새긴 금반지도 맞췄다. 이후 글자의 효력발휘는 불발됐지만...(내 반지는 N인데, 고된 세상살이의 훈장인지 손가락이 굵어져 수 십 년째 장롱 안에서 취침 중)

또 남산에 올라 옹기종기 지붕을 맞댄 집들을 내려다보며 맹세했다. 각자 미래의 꿈과 소망의 선택지가 다르겠지만, 한동네서 오순도순 모여 살자고. 인생은 결코 예정표대로 안 된다는 걸 순전무구[純全無垢]했던 우리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저 ‘원하면 되는 거지’ 하고 자신만만했으니까. 그러나 각자 결혼이란 변수아래 주어진 현실의 답대로 삶의 파도와 정신없이 맞서다보니, 손가락 걸고 맹세했던 다짐은 이슬처럼 증발된 채다.

작금엔 신1은 일본 유학중 일본인과 결혼했다는데 수 십 년째 연락두절상태다. 또 하나 신2는 은퇴 후 부여로 귀향한 상태고, 김은 90년대인가 뉴욕과 LA방문 후엔 내내 서울 지킴이다. 강과 나는 같은 미국에 살아도 LA와 뉴욕이니 너무 먼 하늘아래다.

2000년, 남편이 LA 근무 중, 마침 동창들과 여행 온 신2가 합류, 셋이서 세도나 여행을 만끽했었다. 2005년에야 비로소 서울서 넷이 뭉쳐 동해안을 일주했다. 근 40년 만에야, 다시금 우리로만 남을 수 있었던 그때로 복귀한, 값진 시간이었다. 그러다 신2와 강이 뉴욕으로 와서 해후했던 게 2009년도니, 만난 지 어언 15년이다.

가끔 되새겨지는 남산의 다짐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치기 어렸나 싶지만, 우린 정말 스노우볼 하얀 꽃잎과 은은한 향기처럼 순수하고 고왔었다. 비록 몸은 이역만리 떨어져 살아도 마음만은 카톡으로나마 자주 만나니, 남산의 약속실천 유효가 아닐까.

이제는 안다. 삶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그럼에도 삶이 힘겨울 때, 소녀시절 멤버들과 누볐던 백운대등반이나 강릉여행 등의 예쁘고 소중한 추억들을 회상하면, 살포시 순수함에 젖어들며 풍요로워진다. 그래서 섹스피어도 오래된 친구와 와인은 항상 좋다하지 않았는가!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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