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당파라는 사심(私心)

2024-09-27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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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가니 국회대로 사거리 여기저기에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국민은 옳았고 정치가 틀렸다!”, “윤석열 정권의 신친일 행각, 서민경제 폭망, 의료대란! 이게 나라냐!!”, “범죄자 이재명 문재인 방탄 더불어민주당 해산”$ 다들 자기주장을 펴고 있다.

지난 8월15일에는 뉴욕에서 온 부부의 경복궁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 광화문너머 대로에서 들리는 확성기 고함소리가 경복궁 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한인여성의 유대인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광화문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정체되면서 열린 8.15집회에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증거”라고 답했다.

얼마 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茶山) 정약용 생가와 묘소를 가게 되었다. 마침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작과 비평사 출간)를 읽고 있던 중이라 그곳에 가게되어 참 좋았다.


정약용(1762~1836)은 의학 철학 천문 지리 역사 종교 윤리 음악 서화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탁월한 인재로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생가 여유당(餘裕堂)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1986년 복원한 것이지만 조선의 인재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제의 생가로 당시 사대부 집안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생가 뒤 뒷동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부부 합장묘 하나가 아늑하고 검소하면서도 정갈하게 모셔져 있다. 바로 정약용과 아내 풍산(山) 홍씨다. 아내는 정약용이 49세인 1810년에 만든 ‘하피첩’의 주인공이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어루만졌던 부인의 여섯 폭 치마가 색이 바래자 가위로 잘라서 4첩을 만들었다. 두아들에게는 가족간 유대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귀양갈 때 어린이였으나 십수 년 못본 사이 시집간 딸에게는 그림(매화가지에 앉은 한쌍의 새, 매조도) 과 글을 써주었다. 그런데 하늘이 낸 인재 정약용은 왜 18년이나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을까? 그 긴 세월동안 귀양살이가 풀린 기회는 없었을까?

정약용이 성군 정조의 총애와 무한한 신뢰를 받을 때부터 시기 질투한 노론벽파는 그를 여러 번 조정에서 물러나게 만들었고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바로 그다음해 순조 원년 김대비의 섭정하에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사학엄금교서가 선포되고 정약용은 사학장이로 체포되어 멀리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18년 유배후 고향에 돌아와서 등용 의견이 나왔으나 못난 자들의 상소와 극렬한 저지는 여전했다.

정약용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18년 동안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뚫릴 정도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여 책 500권을 후세에 남겼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자세와 실무 지침서인 ‘목민심서’, 국가재정 낭비를 줄이는 제도의 개혁, 관제의 축소를 역설한 ‘경세유표’, 백성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지방정치 개선의 지침서인 ‘흠흠신서’ 등이다.

“조정은 백성의 심장이며 백성은 나라의 팔다리와 같은 것이어서 한결같이 맥박이 뛰고 피가 돌아 한순간일망정 쉬는 틈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과 공포에 떨고 있고 많은 지역이 소동에 뒤흔들리고 있어도 조정에서 아무런 구호대책도 세우지 않고 자기들의 권력다툼과 이익 다툼에만 정신을 팔고 있으니 이러다간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김이재의 편지가 강진으로 오자 정약용이 보낸 답장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여전했고 벼슬아치들의 횡포는 시들 줄 몰랐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나라의 정치가 바로잡혀야 한다.’ 정약용의 수많은 책의 가장 큰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당파라는 사심(私心)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 올바른 세상을 만들자 ’는 정약용의 사상은, 모든 벼슬아치, 오늘날 선출직 공무원들은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여야가 서로 비방하고 헐뜯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18년 세월을 독서와 저술로 승화시킨 정약용이 떠올랐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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