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공감의 힘’

2024-09-03 (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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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중에 험상궂은 강도가 낮에 봐 두었던 집 답을 넘었다. 단숨에 안방을 침입한 강도가 부부에게 시퍼런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두 손 바짝 들어. 엉뚱한 짓하면 죽는다.” 겁에 질린 부부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세히 보니 남편은 한 손만 들어 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강도는 소리쳤다. “내 말이 안 들려. 두 손 다 들란 말이야.” 남편이 말했다. “오른쪽 어깨가 신경통입니다. 통증이 심합니다. 팔을 치켜올릴 수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그 순간 강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신경통이라고 했소? 아픈지 얼마나 되었소? 무척 아프지요?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강도는 자신이 강도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집 주인과 함께 신경통 증세에 대하여, 아픔에 대하여, 치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강도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는 따뜻한 공감의 말을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 (오 헨리의 단편 ‘강도와 신경통’ 중에서)


공감(empathy)의 힘은 놀랍다. 아픔과 고난을 함께 공유하며 공감할 때 강도는 더 이상 강도가 아니다. 공감대 안에서 우리는 가까운 벗이며 한 가족이다. 유대 신비주의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높은 수준의 공감 관계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라고 했다. 다니얼 골만은 ‘높은 공감은 높은 SQ(사회지능지수)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나의 친구’, ‘나의 가족’이라고 했다. 예수는 공감의 대가다. 예수는 무명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뜨거운 정오에 야곱의 우물가에서 기다렸다. 세상은 정결하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을 사회구성원의 원(圓) 밖으로 네 몰았지만, 예수는 이 여인이 원 안으로 넉넉히 들어올 수 있도록 더 큰 원을 그려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이 여인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것이 예수가 가진 공감력의 비밀이다.

외롭고 힘들어서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성큼 다가가서 베푸는 따뜻한 사랑의 말 한 마디, 친절한 손길 하나는 인간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추동력(推動力)이다.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공감을 이룰 수 없다.

여리고성의 세리장 이었던 삭개오는 유대사회와 극심한 단절을 경험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는 구석에 모여 쑥덕거리며 비난하는 무리를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삭개오에게 다가가 공감의 언어로 말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상대방의 약점과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 지금보다 더 나은 길을 투명하고 자연스럽게 보여 주는 것, 마음의 방어벽이 걷힐 때 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것, 진정 의미 있는 삶의 길을 선택하도록 인격적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은 예수가 빈번하게 사용했던 공감의 원칙이다.

법이나 징벌을 통해서 강박한 강도가 변화하지 않는다. ‘나와 타자’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로 상승할 때 강도는 선한 사람이 된다. 당신은 리더인가. ‘나와 너’의 관계 분열을 겪고 있는 인간 영혼의 공기를 환기하는 통풍기가 되라. 이 시대는 예수를 닮은 공감의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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