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고엘 정신’

2024-05-20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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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친위대가 버스를 정차시키고 올라와 외쳤다. “한 사람도 움직이지 마시오. 신분증 검사합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시프라(Shifra)라는 중년 여인은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옆에 않아있던 중년 신사가 물었다.

“부인, 왜 그렇게 두려워 떠십니까.” “제겐 신분증이 없습니다. 전 유대인입니다.” 시프라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그때 그 중년 신사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시프라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이 멍청하고 한심한 마누라야, 내가 정말 미치겠다. 미치겠어.” 나치 친위대원이 왜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냐고 물었다. “아니 제 마누라가 신분증을 또 잃어버렸다내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년 신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친위대는 중년 신사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그 신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혜와 자애를 갖춘 ‘고엘’(Goel)이었다. 시프라는 그 이후 다시 한 번도 그 신사를 보지 못했다. (하워드 슈발츠의 ‘Palace of Pearls' 중에서)

‘고엘(Goel)’은 뜻밖에 당한 형제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보고 모른척하지 않는다는 한 가족 의식과 자비로운 형제애를 말한다. 가나안 땅에 처음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타 종족보다 문화, 경제적으로 열등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뼈저리게 배운 것은 ‘고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멸망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랑하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를 가나 고엘 정신을 되살려서 그들의 공동체를 안정시켰고 세계에서 사회관계 구성이 가장 발달한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지옥을 ‘타자가 없는 상태(Hell is the absence of other people)’ 라고 정의한다. 소련의 어느 노동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글릭스만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재소자가 나에게 소금 한 줌을 건네주었다. 나는 이 소금을 고깃국 속에 넣었다. 고기가 다 익자 나는 소금을 준 그 재소자를 불러 함께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재소자가 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고엘 정신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 번영과 생존의 깊은 뿌리이며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반석이다. 빅토 프랑클은 말했다. “자아성취의 목표를 초월하여 타자의 성취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줄 때 인간의 참된 가치인 고엘 정신이 실현된다.”

예수는 말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하여 모세, 다윗, 느헤미야, 에스더, 바울 등은 모두 위대한 ‘고엘’이었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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